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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Jun 28. 2022

내 안에... 너 말고 내장지방 있다!  

#. 다이어트 #.헬스장에서생긴일 #.남편의 의심스러운 기억력에 대해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확실한 느낌이 왔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 그 해, 첫 아이의 출산이 임박해 찍은 만삭의 몸무게를 오롯이 홀몸으로 

재현해낸 것이다. 뭘 입어도 감출 수 없는 중부지방에 모인 그것들이 점점 버거워지고 가끔은 부끄러워졌다.  


     "내 안에... 내장지방 있다!" 


 갑자기 그럴듯한 프로필 사진을 찍을 계획 같은 걸 세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대로 계속 똑같이 먹고살면 안 될 거 같았다. 먹는 양을 줄여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기운만 없어지고 덜 먹은 그 음식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신경질이 나고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러다 결국 참았던 식욕이 폭발하며, 더 많은 음식을 흡입했고 비로소 마음에 폭죽이 팡팡 터졌다. 하지만 곧 칠흑 같은 어둠의 모습을 한 자괴감이 찾아왔다. 나는 절망했다.    

  



 어느 날 아침, 불현듯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챙겨 단지 안에 있는 헬스장으로 갔다.

에어 팟을 귀에 꽂고 방탄의 음악을 들으며 러닝 머신 위를 걷기 시작했다. 일단 'DNA'로 가볍게 출발한다. 

그리고 '아이돌'. 방탄의 '아이돌'을 들으며 걸을 수밖에 없다. 정말 그렇다. 그리고 이 노래는 점점 고조되면서 빨라진다. 결국은 뛸 수밖에 없다. 헥헥헥헥 숨이 넘어갈 듯하다. 마스크를 쓴 채라 아무리 숨을 들이마셔도 들어오는 건 얼마 안 되니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지옥의 맛을 봤다 싶을 때 이어지는 다음 곡은 역시나 방탄의 '불타오르네' 파이어! 시작할 땐 잠깐 분위기 잡으며 느려지는 부분이 있다. 나도 잠시 숨을 고르며 걷다가 중간을 지나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파이어 파이어 파이어!!! 제목처럼 불타오르면 나는 또 힘을 내 뛰어본다. 쥐어짠다. 그러다가 마지막 가사 "용서해줄게!" 그렇게 노래가 갑자기 끝나면 후 깊은숨을 내쉬며 겨우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다음은  'Permission to Dance'가볍게 상큼하게 기분 좋게 리듬이 이어지며 나는 마치 방탄의 손에 잡혀 이끌리듯 비로소 가볍게 달린다. 초반에 '아이돌'을 들으며 뛸 땐 숨이 꼴딱 넘어가게 힘들고 엉덩이는 무거워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지만 마침내 그 고비를 넘기고 'Permission to Dance'를 만나면 살 것 같다! 그리고 이 세 곡의 앞 뒤로 스포티파이에서 추천한 경쾌한 곡들을 들으며 걷다 보면 40분이 금방 지나간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안타깝게도 체중에는 큰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했다. 그저 한 끼 폭식이면 그동안 내가 흘린 땀, 노력은 부질없이 사라질 것이다. 갱년기 여성의 체중은 웬만해선 줄지 않는다는 슬픈 현실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비록 심미적 목적을 위해 체중을 줄이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런 운동도 필요할 거라 믿으며 계속 달리기로 했다. 추가로 얻은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마음의 파도가 잦아드는 경이로운 느낌을 알게 됐다. 헥헥대며 달리면 이 꼴 저 꼴, 짜증 나는 꼴들이 머릿속에서 희미해지고, 다 부질없어진다. 그렇다 지금 난 '쓰기'보다 '뛰기'에 매진해야 한다.        

 

     "내 안에... 내장지방 아직 있다!!!"            



  

 어느 날엔가, 러닝머신에서 헉헉대며 뛰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내 옆에 오셔서 조용히 걸으신다. 

그렇게 천천히 한참을 걸으시더니 할 만큼 하셨다는 듯 러닝 머신에서 내려와 출입문 옆에 있는 진동판 위에 올라서서 한참 동안 몸을 덜덜덜 푸시고는 등이 다 젖은 뒷모습을 보이며 조용히 나가시는 거다. 

헬스장을 오는 할머니라니! 정말 대단하세요! 박수라도 쳐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문득 예전에 들었던 지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원 씨, 제가 요즘 영어학원을 다니잖아요.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해서 제가 했는데,
     어떤 젊은 친구가 박수를 치는 거예요. 나... 기분이 좀 그랬어요. 우리 나이가 영어로 자기 소개하면

     박수받을 나이인가 봐요." 


 지인은 삼성에 입사했었고, 신문사에서도 일했고, 방송도 했다. 나와는 기업 홍보물과 교육과정 개발하는 회사에서 일하며 만났는데, 이후 우리는 드라마 보조작가를 함께 했다. 게다가 그녀는 단막극으로 모방송사를 통해 당선까지 된 인재인데,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박수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을 리가 있나!   

내 옆에서 천천히 걸으시던 그 할머니도 할머니 만의 특별한 역사와 우주를 간직하고 계실 거다. 

어쩌면 오래전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메달을 따고 거액의 연금을 받는 분일 수도 있고, 히말라야를 수시로 등반해온 등반가일지도 모른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성공적으로 진두지휘하신 전략가 일지도 모르는데 

방탄 노래 좀 들으며 헉헉대며 뛰는 내가 뭐라고 할머니한테 박수를 친단 말인가!   


    "니 안에 아직도 내장지방 많다. 정신 차려 지원아!!"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남편과 함께 헬스장에 간 날, 

나란히 놓인 여러 대의 러닝머신에는 이미 몇 명이 올라가 걷고, 달리고 있었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건 

단 한 사람. 하나로 묶은 긴 머리에 잘록한 허리가 강조된 레깅스와 짧은 민소매 상의, 전체적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의 그녀는 누가 봐도 한눈에 시선강탈이었다!  

게다가 혹시 특수부대원 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찌나 거침없이 달리던지! 달리고 또 달리고 그러다가 

손목에 찬 워치를 보며 페이스를 조절했다. 그녀의 존재만으로 '물'이 좋은 헬스장처럼 느껴졌다. 

건강미라는 것이 바로 저것이다! 나는 그녀를 봤다. 흠모했다.

물론 나만 봤을 리 없다. 중년의 뱃살을 품은 아저씨도 근육맨을 꿈꾸는 젊은 청년도 모두 그녀를 봤을 거다. 너무나 날씬하고 멋진 그녀는 시선강탈의 아이콘이 분명했으니까! 

그런 그녀에 비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큰애는 헬스장에 가는 날 보며 만두가게 주인아줌마 같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 어려서부터 비유에 능통하더니... 기분은 나쁜데 너무 적절해 웃음이 터지고 만다. 

그래! 비록 지금은 내 몸의 형태를 분명하게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처지다. 

하지만, 곧 그녀처럼 짧은 크롭 상의와 강렬한 레깅스로 나의 비밀스러운 중부지방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으며 파이어!  


    "오빠, 오늘 헬스장에 그때 그 여자 또 왔더라! 

     피부가 까맣고 머리 정말 길고 레깅스 입고 워치 보면서 막 뛰던. "

    "누구?"

    "아니, 그때 나랑 헬스장 갔을 때, 까만 피부에 워치 보면서 막 뛰던 그 여자,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는데 누구?"

    "아니, 나랑 헬스장 간 날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 나는 기억이 안 나요."  

    "아니이이~~!!!!"

    

    "엄마! 아빠 기억 안 난데!! 그만 좀 물어봐!"


 기억이 안 난다? 훗. 떠오르는 기억을 지우기 위한 걸까? 갈 곳을 잃은 듯 흔들리는 눈동자, 동공의 떨림까지 생생하게 전달되는 이 느낌은 뭐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아니 기억할 수 없다는 남편의 말에 갑자기 웃음이 빵 터졌다. 어디서 보고, 배운 건 있어가지고... 그래, 뭐 그녀를 상세히 기억하는 것보단 낫다!     


    "내 안에 내장지방, 아직 많지만, 언젠간 사라질 거야! " 

 


 

우연이가 그린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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