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지원 Sep 05. 2020

엄마가 빨간 립스틱을 바를 때!

학원 원장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너무... 덥다.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까지 여름 방학을 했다. 이번 여름방학에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데, 큰일이다. 구구단 외우기가 너무 싫은 이 아이는 구구단만 외우자고 하면 미간으로 레이저를 쏘며 반항을 한다. 





십 년 전 큰 아이를 키울 땐, 구구단 중요한 것도 몰라서 아이가 학교에 가 선생님한테 손바닥을 맞기까지 했었다. 차라리 그 바람에 혼나고 금방 외웠다. 그땐 그랬지만, 이젠 구구단 중요한 거 아니까

미리 외우고 학교에 보내고 싶은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둘째 아이의 친구들 중에는 19단까지 외운다는 아이도 있다는데, 2단 3단도 외우지 못해 이 난리다. 하여간 달래고 달래 외우라고 하면 꼭 물어보는 아이. 


“엄마, 구구단은 누가 만들었어? 왜 꼭 외워야 하는 거야?”


엄마도 모른다. 그놈의 구구단, 왜 누가 만들어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그래도 외워야 한단다. 선생님한테 혼난단다. 친구들은 다 외우는데, 모르면 망신을 한단다. 한참을 외워본다. 노래도 불러본다. 다시 해보라고 하면, 못한다! 또 십 년 수학 고생길이 열렸다.


큰 아이 키우면서 수학학원 찾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큰애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근처 자립형 공립고등학교에 합격하고 마치 서울대학교라도 합격한 듯 좋아서 펄펄 뛰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떨어질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입학을 한다니 걱정되는 게 한 둘이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 고입 진학에 대한 설명회가 많이 열리는데, 거기서 모두 이구동성 하는 말이, 자립형 공립고, 외고, 특목고는 내신관리가 힘들어 대학 진학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 설명회를 나만 들은 것도 아니고, 어쩌면 그 설명회가 그 해 그 학교 미달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나도 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 때문에 이번 겨울 방학 동안 뭔가 아주 특별하게 우리 아이를 수학의 달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로 활활 타올랐다.


마침 정수기를 갈아주는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아주머니 딸이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수학학원은 어디를? 자연스럽게 수학학원으로 주제가 넘어갔고, 학원 하나를 추천받게 되었다. 그날 바로 상담 예약을 잡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당시 여섯 살이었던 둘째까지 데리고 출발! 나는 이렇게 저렇게 꾸밀 여유도 없어 경량 다운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화장도 안 한 채, 아이 둘을 태우고 급히 학원으로 차를 몰았다. 긴 생머리를 꼬아 볼펜으로 찔러 고정시킨 학원 원장은 나를 보자마자 기선제압을 한다.


당신은 너무 늦게 나를 만나러 왔으며, 자립형 공립고에 들어가는 건, 완전히 나쁜 선택이고, 이제라도 학교 합격을 취소하고 우리 학원에서 전략적으로 학습해 학교 내신과 다양한 스펙을 쌓아 학종으로 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멍했다. 문득 방금 설거지를 마친 손에서 세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트레이닝 바지엔 왜 그렇게 얼룩이 많은지... 몇 년 입은 경량 다운에는 몇 가닥 오리 털이 삐져나와 왠지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드는 거 같았다. 그래서 였을까? 갑자기 말투가 더욱 공격적으로 바뀌더니 요즘 고등학교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에 대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당신이 공부하던 고등학교와는 완전히 다르며, 이런 새로운 학습은 우리 학원에서만 전략적으로 준비해 줄 수 있다며 나에게 이상한 퀴즈 같은 걸 막 내는 것이다. 난 아무것도 답하지 못했다.


그날따라 난동을 부리며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고 있는 둘째 아이 때문에 정신이 더 빠져나가는 바람에

나는 찍소리 한 번을 못하고 그 학원 원장의 전략대로 완전히 멘털이 붕괴되고 말았다.


게다가 내가 상담하고 있는 동안 우리 큰 아이를 데려다가 레벨 테스트를 했는데, 그 점수가 완전히 바닥을 친 것이다. 학원 원장은 그 점수를 보여주며 기세 등등해져서는 이것 봐라, 니 아이의 레벨은 이 정도인데, 무슨 자립형 공립고냐, 동네 일반고를 다니며 우리 학원과 함께 전략적으로 체계적으로 입시를 준비해! 그.. 그런가? 마음이 흔들렸다. 


완전히 늦은 밤이 되어 두 아이를 데리고 학원을 나왔다. 처참했다.


“야, 너 레벨테스트 점수가 그게 뭐야? 니 점수가 그러니까 학원 원장이 엄마를 무시하잖아... 너 그 학교 포기해. 그 점수로 무슨... 그 학교 가서 내신 못 따고 학종 물 건너가면 대학도 못 간데... ”


“공식 기억 안 나서 그런 건데, 왜 그래. 그 문제들 완전 까다롭고...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니었어!!!!”


한참을 갇혀 있었던 여섯 살은 짜증 폭발, 처음 만난 이상한 학원 원장한테 완전히 짓밟힌 엄마와 이상한 레벨테스트를 받고 돌아버린 큰 아이는 분노 폭발. 우리는 서로를 향해 마구마구 상처를 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학원 원장이 원생 한 명의 이름은 언급하며 자랑을 늘어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와 같은 중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란다. 그렇게 잘하는 아이라면 내가 알 텐데, 왜 그 아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까. 이상하다 싶어 딸에게 물어보니, 우리 아이는 깜짝 놀라며 그 아이, 그 정도 아니라며 펄펄 뛰는 거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학원 원장의 저주에서 어느 정도 풀려날 수 있었다. 그래도 정수기 아줌마의 추천을 믿고 거길 다니긴 했다. 수업은 잘 모르겠고, 딸이 학원에서 이것저것 보고 들은 걸 나에게 들려주었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하루는 자신의 수학 선생님이 학원 원장한테 혼나는 장면을 봤는데, 왜 아이들에게 과학 수업 등록을 권유하지 않냐며, 수학을 하는 아이들이 과학 수업도 들어야 한다며 소리를 질렀다는 거다. 수업하는 선생님한테 영업까지 강요하는 악덕 학원 원장, 맞다. 내 생각이. 그럼 그렇지. 내가 이겼다. 무슨 대단한 교육철학과 전략이라도 있는 듯 잘난 척하더니... 


나는 그 학원 원장과의 만남을 통해 어마어마한 깨달음을 얻었다. 학원은 우리 아이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으며, 그 사람이 나를 보는 기준은 우리 학원에 얼마나 돈을 가져다줄 사람인가? 그것뿐이라는 것을. 


전부 다는 아니지만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런 학원 원장을. 나처럼 저주에 걸리지 말고, 아이와 내가 한 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도 구구단이 왜 필요하냐며 따지는 우리 둘째를 데리고 또 이곳저곳 학원 문을 두드려야 할 텐데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내 육아 동지는 학원 상담을 갈 때,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간다고 한다! 나도 발라볼테다 새빨간 립스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