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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Dec 17. 2022

동화 공모전 탈락 후기

비룡소 [NO 1. 마시멜로 픽션] 걸스 스토리  공모전에 도전해봄!

지난여름 큰 아이가 나에게 동화 공모전 내용이 담긴 링크를 하나 보내주었다. 


비룡소의 [NO1. 마시멜로 픽션]. 사춘기 소녀들을 위한 걸스 스토리 공모전이란다.  

마감까지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가능할까? 

솔직히 쓰는 일을 오래 하긴 했지만 내가 쓴 건 '글'이라기보다는 '말'에 가깝다.  

그리고 특히 동화는 써볼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아름다운 세계를 다룰 만큼 내 영혼은 아름답지 않다!   


"엄마, 내가 좋아하는 재클린 윌슨이나 로알드 달 같은 작가의 동화는 엄청 재밌거든

 근데 우리나라 동화는 너무 진지해. 그러니까 엄마가 재밌게 써봐. 재클린 윌슨도 엄마처럼

 방송작가였다는데?" 


초등 5학년인 둘째 딸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 아이는 학교를 다녀온 후 교실에서 친구들, 선생님과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들려준다. 

어떤 에피소드는 너무너무 재미가 있다. 배꼽을 잡고 깔깔 웃게 된다. 

그리고 묘하게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아이들의 러브라인도 아주 흥미진진했다. 

이 세계, 나만 알고 있기 아까운데... 구슬을 꿰는 심정으로 한번 써볼까? 

'잘' 쓸 자신은 없어도 재밌게! 는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비로소 써 볼 마음이, 용기가 차올랐다.    


이야기 제목은 '나나는 그럭저럭 열두 살' 

아직 동화가 된 건 아니니 '이야기'라고 부르겠다. 

내가 쓴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은 박나나. 나나는 모모와 제인 에어를 좋아하고, 

해리포터 덕후이며 현재 판타지 소설을 집필 중이다.  

5학년이 되며 가까웠다 멀어진 그래서 아주 불편한 동성 친구와 같은 반이 되지만

결국 그 아이와 화해하고 나쁜 선생님에게 지혜롭게 맞선 용기 있는 남자 친구와 러브라인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원고지 370장 분량으로 완성시켰다.  

쓰다가 암담해지면 재클린 윌슨의 동화를 읽었다.

'나는 작가가 될 거야!', '잠옷 파티', '고민의 방'...   

읽고 쓰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


아이가 읽는 초등 고학년 동화를 가끔 읽는데 

등장하는 아이가 너무 아이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본 현실의 열두 살 아이는... 거의 성인에 가깝게 생각한다. 난 거기에 집중했다.

당돌하고 용기 있지만 가끔은 부조리한 상황에 마음이 오그라 들고 아프다. 

사소한 일로 마음이 꺾이고 머리가 복잡해지는 열두 살 소녀 박나나. 

그 아이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 말해주고 싶었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마음은 원래 그래." 

평범해 보이는 정상 가정 안에 숨겨진 오래 묵은 갈등도 직면해보았고,

무엇보다 사춘기 여자 아이들 동화의 필수요소가 된 생리 판타지. 

그것만큼은 꼭 저항해보고 싶었다.


여자 아이들 동화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추가 설명을 하자면

이런 동화가 생리를 다루는 방식은 판타지에 가깝다. 


"생리하면 기분이 어떨까? 나도 하고 싶어!" 이런 느낌인데

특히 기억이 남는 동화는 '하나님 저 마거릿이에요!'. 주디 블룸이라는 미국 작가가 쓴 소녀들의 동화인데

이 동화에 나오는 소녀들은 생리를 하고 싶어 아주 난리법석(?)들이다!


아! 잠깐 작년에 본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2021)'얘길 안 할 수가 없겠다.


이 영화는 1995년 뉴욕을 배경으로 그 당시 큰 인기를 누린 '호밀밭의 파수꾼' 작가 셀린저가 소속된 

작가 에이젼시에서 일하게 된 사회 초년생 조안나의 이야기다. 

난 이 영화가 정말 좋았다! 

이십 대에 느낀 불안함과 열정이 예쁜 화면에 촘촘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조안나가 일하게 된 그 에이젼시에

소속된 작가들 중 '하나님 저 마거릿이에요!'를 쓴 주디 블룸이 있다.   

작은 에피소드로 출연까지. 유명한 작가님이군! 미루어 짐작해봤다.  

 

우리나라 작가의 동화 속 생리는 뭐랄까? 과도하게 추앙(?) 받는 느낌이랄까?  

요즘 아이들은 생리를 생각보다 빨리 시작한다. 학교에서 받는 성교육의 수준도 매우 높다.

(아주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유튜브나 관련 책을 통해 얻는 지식도 아주 구체적이라 

예전만큼 생리가 그렇게 신비로운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생리를 그렇게 신비롭게 추앙하는 소녀들이 그렇게 많을까? 의아했고,  

무엇보다 두 딸의 지지가 강력했기에 한 번 들이받자! 하는 심정으로 저항했다.     

혹시나! 어쩌면!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가끔 맴돈 건 사실이다. (누구나 그렇죠?ㅎ) 

하지만 '나나의 그럭저럭 열두 살'은 최종심에도 오르지 못했다.    

심지어 이번 공모전 심사위원 두 사람 중 한 분은 내가 그토록 저항하고 싶었던  

생리 판타지가 담긴 진지한 작품을 쓰신 분. 허탈했다! 

혹시 내 이야기를 읽었다면, (응모작이 34편밖에 안됐다고 했으니 읽긴 읽었겠지?)

"뭐야? 내 작품 비판한 거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비판 맞습니다. 전 소녀들에게 생리 판타지를 심어주는 동화가 좀 불편하거든요!  


물론 심사위원의 눈 밖에 나 내 이야기가 탈락했다는 건 아니다. 여러 가지가 다 부족했다. 

심사위원이 쓴 심사평에는 최종심에 오른 세 편이 왜 당선작이 아닌지 그 이유가 담겨 있었는데,  

읽다가 반성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당선작이 될 수 없다고 하는데도 난 그 세 작품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이디어도 새롭고 자료조사도 많이 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현재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지는 내 이야기와는 스케일이 달랐다. 

이 공모전의 이름인 NO1. 마시멜로 픽션의 '픽션'은 판타지여야 한다는 뜻이었나 보다.  

비룡소가 이 공모를 통해 세상에 내놓고 싶은 작품의 스타일이 분명해 보였다.  

과거 당선작을 뒤늦게 살펴보니 분위기도 알겠다. 

내 이야기는 공모전 취지에도 맞지 않았다. 난 승복했다. 

혹시나! 어쩌나! 는 로또복권을 살 때나 한 세트다.  


지금 이 공모전은 몇 년째 당선작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도 응모한 34편의 동화 중에 가장 괜찮은 작품을 쓴 작가에겐 기회를 주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역시 내 오지랖은 국가대표급.


브런치에서 당선 소식(또는 출간)을 전하는 글을 종종 만난다. 너무너무 부럽다! 

탈락했다는 글도 어디 있긴 있을 텐데, 아직 읽어보진 못했다.

당선작보다는 탈락되는 작품의 숫자가 훨씬 많을 테니 나처럼 도전에 실패하는 분들도 

분명 어딘 가 있을 것이다. 동병상련의 아픔은 나누면 좀 작아지는 느낌이 있으니까,  

이 글이 작은 위안이 되길!   


속상하고 힘들 때 통화를 하는 오래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늘 이렇게 말해준다.


 "나도 그래!" 


정말 마술 같은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체국에 가면 크기가 다른 봉투가 비치돼 있고, 크기 별로 가격이 다르다. 

공모전 탈락을 통해 내가 느낀 실망감. 여기서 비롯된 불행의 크기가 

제일 큰 사이즈의 봉투급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며칠은 우울하게 그냥 날 내버려 두었다. 

우울이라는 사치를 부렸다.  

이야기를 쓰는 거 재밌기도 했지만,  

노트북 빈 화면에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망막하고 힘든 적도 분명 있었으니까.       


"엄마가 당선은 안됐지만 내가 칭찬하고 싶은 게 있어. 

 나나 친구 중 다정이라고 있잖아, 입양된 아이. 다른 동화를 보면 입양된 아이들은 대부분

 친엄마를 찾으려고 하고 그늘져서 어둡거든, 근데 엄마는 그렇게 안 했어! 그게 아주 마음에 들어.

 근데 엄마는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해!"  


둘째 아이의 구체적인 칭찬과 날카로운 비판 덕분에 웃음이 나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나나 일기 얼마나 더 썼냐며 물어보고 지금 당장 읽어도 되냐고 졸랐었다. 

나나의 그럭저럭 일기에 쓰라며 더 많은 교실 에피소드를 꺼내놓으며 조잘조잘 대단했다.  

그런 여름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게 우리가 함께 만든 행복이니까. 


탈락의 씁쓸함 같은 건 조금 멀찍이 미뤄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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