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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Nov 07. 2023

너무 어려운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전체주의군국주의#스즈메의 문단속#사춘기 육아일기

* 스포일러 있음 


 내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접한 게 정확히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불법 VHS 테이프로 봤다는 거다. 당연히 화질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안 됐다. 

압도적인 감동, 그 자체였다. '붉은 돼지', '반딧불의 묘', '이웃집 토토로'...

이후 DVD로 접한 '반딧불의 묘', '귀를 기울이면', '마녀키키'... 특히 어린 마녀인 키키의 수련과 성장을 담은 '마녀 키키'를 나는 사랑한다. 키키는 진짜 마녀가 되기 위해 가족과 집을 떠난다. 낯선 마을에 정착해 자기 몫을 다하고 결국 인정을 받는다. 난 요즘도 가끔 마녀 키키를 본다. 살짝 우울할 때, 삶이 고단하다고 느낄 때, 착해지고 싶을 때...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비행선 내부를 구경하다가 추락 위험에 처한 친구 톰보를 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받는 그 장면. 매번 감동이 밀려온다. 눈물이 고인다.

 

"그래,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저 어린아이도 자기 몫을 다 하기 위해 저렇게 애를 쓰는데, 

 갱년기가 뭐라고, 중년이 뭐라고! "    


 일본의 전쟁 역사를 통해 작품을 해석하게 되면서 다시 본 '반딧불의 묘'는 조금 불편했다. 

이 작품은 부모의 사랑 속에서 밥 먹고, 놀던 남매가 전쟁을 겪으며 부모를 잃고 버려져 배고픔에 

허덕이다 굶어 죽는 이야기다. 어떤 종류의 차가운 피도 절절 끓게 만들 이야기다. 처음 이 작품을 보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 감동과 눈물이 소중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가라는 걸 

잊고 싶었다. 모르고 싶었다. 그것만 모를 수 있다면, '반딧불의 묘'는 전쟁의 참혹함을 가장 잘 표현한 

예술 작품 중 거의 일등이라고 생각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중년인 나에게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이름인데, 현재 초등학생 아이들 사이에서도 그 명성이 대단한 모양이다. 막내의 카톡에 같은 반 친구가 보낸 메시지가 있어서 보니, 


친구      그어살 봤어?

            나 보고 옴

            ㅎ ㅏ 웅장이 가슴해진다

            하야오 그는 천재야. 


막내     아직 못 봤어. 


 아차차! 아직 못 봤다고 톡을 보낼 때 얼마나 속상했을까. 막내는 개봉 전부터 이 영화를 빨리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엄마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월요일 저녁이었지만 아이를 데리고 바로 극장에 갔다. 

한산한 극장 내부. 상영관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상영 시간이 임박하자 열명 남짓 관객이 앉았고, 드디어 영화가 시작됐다. 아이의 눈망울은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엄청 이글거렸다. 엉덩이가 들썩들썩하는 폼을 보니, 아주 조금... 내 육아에 대한 자부심도 생겨났다. 100점짜리 육아는 못했지만 그래도 예술을 향한 갈망이 있는 아이로는 키웠구나! 그리고 나에게도 특별히, 아주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요즘 아이는 한창 사춘기다. 종종 이런 눈을 뜬다. 마치... 


'전 이제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았어요. 어머니. 어머니는 아직 몰라요, 심지어 틀렸어요. 

 그리고 저는 요즘 아주 불편한 감정이 올라와요. 아. 셨. 죠?'

 

엄마가 세상, 아니 우주의 전부인 듯 달려와 안기며 사랑스럽게 날 바라보던 그 촉촉한 눈빛은 사라졌다.

어쩌면 이 작품이 반항과 불안의 아이콘이 돼 버린 이 아이를 살짝 철들게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심지어 제목마저 이토록 직설적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갔다.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아니지만, 일전에 '스즈메의 문단속'을 봤을 때도 머리가 복잡했는데, 비슷하게 

그랬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본 내 느낌을 날것으로 표현하자면, 

재해로 인해 황폐해진 땅을  버려두지 말자는 건데, 그러면 방사능에 오염된 쌀도 먹고, 생선도 먹고, 버려진 그 땅에서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살아라! 하는 건가? 많이 불편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재난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을 위로하는 연극같이 긴 그 장면에서 난 많은 눈물을 흘렸다. 

거기엔 살아남은 우리가 대를 이어 함께 위로하며 살아가자는 따듯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문단속을 하러 다니는 스즈메를 돕는 다양한 이웃이 등장한다. 술집을 운영하는 아줌마도 스즈메를 돕는다.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에피소드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위로한다면, 얼음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도 녹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그들은 피해자의 관점으로 역사를 보고 있다. 

영화 말미에 천황의 테이블을 파괴하는 큰 칼은 아마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 영화는 소중한 가족을 잃고 집을 떠나야 하는 불안하고 끔찍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에게 주어진 일상, 작품 속에서는 단 이틀밖에 유지되지 않는 14개의 불안한 블록 쌓기를 성실하게 

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찌 보면 성실하게 살아라!라는 예술과 동떨어진 주제의식을 은유와 상징으로 

버무려 예술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난 많은 부분에서 저항했다. 하지만 결국은 또 공감했다. 

그래,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이 세상은 너무 어려운 퀴즈 같은 거다. 퀴즈를 풀려고 애쓰며 골치 아프기보다 그냥 내 일상, 내게 주어진 14개의 블록을 성실하고 아름답게 쌓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어떤 날은 불안하게도 쌓고, 다른 날엔 안정적으로 쌓고, 그렇게 계속 쌓다 보면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마저 생겨났다. 거장의 내공이 느껴졌다. 미야자키 하야오 할아버지, 정말 대단하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아이의 얼굴을 보니 혼란 그 자체다.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 아이는 자신을 일본 애니메이션의 덕후라고 생각한다. 토토로와 같은 오래된 작품도 내가 보여줬고, 요즘 유행하는 주술회전, 귀멸의 칼날, 최애의 아이, 하이큐... 거의 다 봤다. 그뿐인가  해리포터 시리즈, 애놀라 홈즈 시리즈, 퍼시잭슨과 올림푸스의 신 시리즈, 황금나침반... 다 읽었다.

(이러니 사교육은 구멍이 날 수밖에!) 그런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어때? 너무 어렵지? 미야자키 하야오는 왜 이 작품을 만들었을까? 뭘 말하고 싶은 걸까?" 

"... 악의 없이 살아라?"

"땡! 그건 아닌 거 같아."


아이 마음속에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우 고소해! 

그동안 내 속을 썩게 한 사춘기 녀석 한테 이렇게 한방 날릴 수 있다니! 


"... 그럼 뭔데?"


나는 두 가지가 불편했지만 전체적인 주제의식에는 공감했다고 대답했다.


"엄마가 불편했던 두 가지는 첫째 전범 국가인 일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표현하는 것, 

 또 하나는 새엄마를 싫어하는 것 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보다 전체의 행복과 번영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그래도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가자는 주제 의식에는 공감했어. 

혹시 마녀 키키에서 키키가 어떤 상황에서 마법을 잃어버리게 되는지 기억나?"


"응, 기억나. 예쁜 옷을 입고 자동차를 타고 놀러 다니는 여자 아이들을 키키가 질투하잖아"


"맞아! 그 나이엔 그렇게 질투심이 생기는 게 당연한 건데,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거 같잖아.

 착한 아이한테 더 착하게 살라고 하는 거 같아서 엄마는 불편했거든

 '그대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도 마찬가지야. 화재로 엄마를 잃고, 어딘가로 왔더니 이모가 이미 

임신을 하고 있어. 심지어 동생이래. 기뻐하래. 그리고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가 이모한테 뽀뽀를 해. 

주인공 소년 마히토 마음이 어떨까?"


"속상하지... 엄청."

    

"맞아. 엄청 속상하지. 이걸로도 드라마 한 편인데, 그러지 말라잖아. 여기서 이모 뱃속의 동생은

 일본의 미래를 상징할 거야. 새엄마인지 친엄마 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동생이 생겨서 일본이 

 계속 대를 이어 번영하고, 발전하는 게 중요하데. 개인의 감정보다 전체의 미래가 더 앞선다는 거지. 

 누군가는 그걸 전체주의라고 하기도 하고. 엄마는 그게 좀 불편하네."


"너무 일본 역사로 작품을 해석하는 거 아니야?"


아마도 아이의 이 질문은 이렇게 해석될 것이다. 

"난 예술적으로 감동을 받았다고! 주제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엄마 말에 반대하고 싶어! 난 사춘기라고!"  

   

"어떤 작가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작품을 만드니까, 의도가 없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전쟁의 역사를 버리고 순수한 눈으로 작품을 본다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거 같아.

 사춘기 너희들 마음이 아주 복잡할 거야. 뭔가가 매일매일 소용돌이를 치고 있겠지.  

 무엇이 옳은지도 모르겠고 그냥 정신없는데, 그럴 때 너희들 일단 학교 잘 다니고, 책 잘 읽고, 

 엄마 아빠 말씀 잘 들으며 매일의 일상, 알지? 그 14개의 블록 쌓기. 그걸 성실하게 해내길 바란다! 어때?"

    

"... 그럼 그 악의는 뭔데? 마히토가 말한 그 악의."


"마히토가 거짓말을 하잖아. 친구에게 왕따를 당하고 학교에 가기 싫어서

 돌로 자신의 머리를 꽝! 일종의 자해. 그걸로 마히토는 죄책감을 느끼고, 

 천황이 다음 세대를 맡으라고 할 때 주저하잖아. 그런데 천황이 괜찮다고 해.  

 엄마 생각엔 사춘기 너희들은 필연적으로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거든. 

 그거 괜찮다고 말해주는 거 같아. 너도 어렸을 땐 몰랐던 어떤 감정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거야.

 그것에 대해 엄마한테 말할 필요는 없어. 그건 그냥 괜찮은 거야. 지나가니까."


"... " 


"그럼, 엄마가 질문할게. 마히토 빵 먹는 장면 기억나? 버터랑 쨈을 듬뿍 발라주잖아. 

 먼 미래에 화재로 사망할 어린 시절의 엄마가. 그건 뭘까?"


"... 글쎄?"


"그건 일종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대한 에피소드야.  

 마히토는 알고 있어. 모험을 마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면 전쟁을 겪고 결국은 다 불행해진다는 걸 

 그런데도 새엄마를 데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잖아. 하지만 그 와중에도 버터와 쨈, 갓 구운 빵 같은

 소소한 행복은 누릴 수 있다는 거지. 소확행."


"응... 그래서 엄마 이 영화 마음에 들어?"


"어떤 부분은 마음에 들지. 전쟁까지는 아니어도 엄마도 요즘 힘든 일이 있는데, 

그걸 해결하기 위해 애쓰면서 소모적으로 살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게 낫겠다! 

마음먹게 되니까. 하지만, 작품에 한계는 있어.    

일반적으로 소년이 모험을 한 후에는 더 용감하고 정의로워져서 예전에는 넘지 못했던 선을 넘거든. 

하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왠지 그러지 말고 더 착하게 선을 지키라고 하는 거 같아서 

좀 불편해. 마녀 키키처럼. 주제는 교훈적이라 살짝 매력이 없는데, 표현은 너무 예술적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네.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생각해. 우연이 생각은 어때?"  


 

 며칠 전 기도모임에 갔다가 고등학생들이 이 영화를 단체관람한 이야기를 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라고 하니, 이웃집 토토로 같은 걸 상상하며 관람을 했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자 

"이게 뭐야?" 다들 이구동성 외쳤다고 한다. 그럴 거 같다. 솔직히 너무 어려운 영화다. 

서사는 없고, 상징만 넘치니 그럴 수밖에. 일본의 전체주의 군국주의를 언급한 비판의 글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여전히 피해자로 전쟁을 인식하는 그들의 역사의식은 나 역시 불편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내가 공감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경우 전체 공동체가 피해 유가족을 위로하는 방식이 그랬다. 위로는 저렇게 하는 건데, 왜 우리는 못하지 그 당연한 걸?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 미아자키 하야오의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는 금방 부서질 테지만, 그럼에도 진심을 다해 살아가는 일상의 소중함이었다. 

나는 왜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가! 솔직히 질투가 난다.

좋아하면 논리가 빈약해도 공감할 수 있다. 싫어하면 논리가 견고해도 공감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 어려운 걸 해낸다. 나는 예언할 수 있다. 미래의 우울한 어느 날, '마녀 키키'를 또 볼 것이다. 

컴컴한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고 싶을 때, '그대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보며 내 앞에 놓인 위험한 구성의 블록을 차근차근 쌓아보기로 마음먹을 것이다. 당연한 소리인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을 사랑한다. 그래서 일본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다행히 그는 전쟁은 싫어한다.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작품을 보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이나 반전의 메시지까지 몸 안에 녹일 수 있기를 바란다. 전쟁은 정말 끔찍하다.                


 "나도 언젠가 엄마처럼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 엄마보다 더 잘 이해하지! 해리포터와 미야자키 하야오! 퍼시 잭슨 속에서 발견한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세계관!"  


함께 영화를 보고 난 후, 아이 눈빛이 달라진 거 같다.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 듯 서늘했었는데, 

살짝 노르끄름한 빛이 감돈다. 여기서 좀 더 밀어붙였다면 오래전 그날처럼 엄마~~! 하며 달려와 안겼을 텐데, 내 능력은 여기까지. 요 며칠 내 말이 좀 먹히는 느낌이다. 기분이 좋다.    


우연이가 그려준 내 모습. 실물보다 예쁨, 주의요망.


작가의 이전글 한 그릇의 뜨끈한 순댓국 같은 연극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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