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글제, 요즘 백일장
하란 것도 아닌데 막내가 백일장에 참가하겠다고 신청을 했다. 근처에 있는 예고 문예창작과에서 개최한
행사다. 몇 주째 안내 문자가 도착하는데 올해는 예전보다 신청인이 많아 혼잡이 예상되니 개인 차량으로 오는 분들은 아주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내용이다. 산문은 원고지 10매가 써야 할 분량이라는데 아이는 원고지에 글을 써 본 적도 없어 보인다. 원고지 첫 장에 제목 쓰고 이름 쓰고 그다음 몇 줄 비우고 첫 문장을 써야 한다고 하니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요즘은 학교독서록도 휴대폰에 입력하니 어쩔 수 없다. 심지어 연필로 쓰는 것도 아니고 검정볼펜으로 써야 하고 수정테이프 사용도 불가. (대입 논술도 검정볼펜으로 써야 한다!) 쓰는 게 직업이지만 솔직히 나도 자신 없다. 전에 유명한 도서 편집자 특강에서 들은 내용인데, 지금 거의 유일하게 원고지에 글을 쓰시는 작가님이 한 분 계신데, 그분 작업실에 가면 책상에 지우개 가루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한다. 십 대 아이들에게 원고지랑 검정 볼펜만 주고 글을 쓰라는 건 너무 가혹하다.
“엄마 나 백일장에서 상 받고 담임 선생님한테 얘기하면 쌤이 엄청 칭찬해주시겠지?”
“어... 그렇겠지. 엄마가 사다준 원고지에 한번 써 봤어? 검정볼펜으로?”
“아니”
“한 번은 해보고 가.”
모르면 용감한 건가? 몰라서 용감하니 다행인 건가? 하여간 꿈은 야무지다. 아이가 아홉 살 열 살 그즈음 일 때, 이것저것 써서 나한테 갖다 주는 일이 빈번했다. 엄마 읽어봐! 하면서 주는 글은 중구난방 정신이 하나도 없게 쓴 판타지 소설. 재미없다고 하면 싹을 잘라버리는 거 같아, 어 멋지네 대단하네 엄마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보지만 고통을 참고(?) 읽다 보면 이게 뭐냐? 말이 안 된다! 나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오고 만다. 한껏 칭찬받을 생각에 부풀었던 아이는 기가 꺾여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발이 없는 귀신처럼 스르르 뒤걸음을 친다. 난 뒤늦게 아니야, 아니야 이만큼 쓴 것도 대단해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지만 기분까지 상한 아이의 마음은 웬만해선 풀리지 않는다. 왜 엄마의 조언은 잔소리 밖에 안 되나 몰라. 쓸 걱정보다 상 받을 생각에 설레던 아이가 과거 수상한 글 몇 편을 읽어봤는지 다급히 엄마를 부르며 달려온다.
“엄마... 수상작 찾아서 읽어봤는데... 엄청 잘 쓰더라. 나... 백일장 나가지 말까?"
"무슨 소리야, 신청했으면 경험은 해봐야지! 네 글이 중구난방 정신이 없긴 한데 독특한 구석은 있어.
심사위원 중에 누군가 네 글을 끝까지 참고 읽는다면 이건 뭐지? 이런 글 처음이야! 하면서 널 궁금해할 수는 있어. 원석 같은 느낌이랄까?"
"... 그렇게 이상해?"
"평범한 것보다는 낫지. 엄마가 심사위원이면 너 뽑지."
좋은 소린지 나쁜 소린지 헷갈리게 하는 게 이 대화의 포인트. 엄마 노릇이 쉽지 않다. 극한 직업.
"엄마!! 어디야? 나 이제 나왔어!"
"어! 엄마가 데리러 갈 테니까 교문 앞 거기, 의자 많은 데 거기 앉아 있어! 어떻게 잘 쓴 거 같아?"
"어, 엄마 근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어어... 근데 글제가 뭐였어?"
"운문은 '냉장고', 산문은 '내 생애 가장 긴박했던 10분'"
"아...!"
운문 글제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산문의 글제는 납득이 간다. 재기 발랄한 이야기꾼을 찾고 싶은 거다. 큰애 대학교 입학하고 고시 설명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강사로 나온 유명 PD가 언론고시 때 에세이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내 기억으로 PD가 받은 글제는 '내 생애 가장 슬픈 날'이었고, 그 PD는 어머니의 흰 머리카락을 염색해 드린 걸 썼다고 했다.
"그래서 넌 어떤 에피소드를 썼어?"
"몰라. 말 안 해."
큰애는 투명한 편이라 조금만 애를 쓰면 입을 여는 편인데, 막내는 음흉한 구석이 있어 쉽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식이 백일장에 나가 '내 생애 긴박했던 10분'을 썼다는데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야 한다고? 아이고 답답해라. 답답해. 무슨 방도가 없나? 며칠 전에 간돼지고기를 넣은 가지튀김이 먹고 싶다고 하던데, 일단 그거라도 튀겨서 온 집안에 냄새를 풍긴 다음 슬쩍 물어봐야겠다.
"그래서 넌 무슨 얘길 썼는데? 응? 응응??"
만약 내가 막내라면... 첫 문장을 이렇게 쓸 거 같다. 그때 난 엄마의 자궁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