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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눈을 뜨면 보이는 것

할머니는 다 알 수 있지

by 임지원

결혼하고 석 달 만에 임신을 했다. 물론 임신 여부는 병원에서 확인했다. 그런데 동시에 나의 임신 여부와 아이기의 성별을 알아보는 특별한 눈, 일명 '제3의 눈'이 있었다. 결혼하고 마련한 신혼집은 서울인데도 구도심이라 골목 어귀에 오래된 작은 구멍가게도 있고, 그 앞엔 평상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그곳은 동네 할머니들의 만남의 장소. 늘 서너 명의 할머니들이 앉아 있었다. 심심한 듯 부채질도 하고 화투를 치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시장. 그곳엔 좌판을 펼친 할머니들이 쪼르르 앉아 열무나 쪽파 같은 김치 관련 재료를 다듬어 팔았다. 집을 나서면 길 옆에 앉은 할머니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흥미롭게 바라보며 한 마디씩 하신다. 임신 몇 개월째인 지, 배가 크네 작네, 내 뱃속의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를 두고 토론이 벌어진다. 어떤 분은 윗배가 부르니 딸이라고 하고 또 어떤 분은 윗배만 부른 게 아니라 아랫배도 불렀으니 저렇게 큰 배는 무조건 아들이라고 한다. 딸인지 아들인지 결론이 나지 않자 이번엔 나의 식성을 물어보다. 고기가 먹고 싶으면 아들이고, 채소가 먹고 싶으면 딸이란다. 둘 다 먹고 싶었던 거 같아 대답을 못하면 답답해도 하셨다. 심지어 첫애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둘째 셋째 타령까지. 아무튼 배가 불러오는 동네 새댁에게 왜 그렇게들 관심이 많으셨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뱃속의 아이가 태어났다. 딸이었다. 나 채소 먹고 싶었나? 나 윗배가 불렀었나? 딸을 주장하던 할머니의 논리가 떠올랐다. 아이가 자라 아장아장 걸을 즈음 함께 시장에 가면 이번엔 아이한테 세상에 있지도 않은 동생이 여자니? 남자니? 마지막엔 둘째를 빨리 낳아서 같이 키워야 한다고 혼자는 외롭다고, 아들이든 딸이든 둘은 있어야 한다고 난리난리...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낳으래..."


할머니들은 경험을 통해 습득한 임신 출산 육아 관련 지식을 맥락도 없이 그냥 마구마구 펼쳤다. 지식과 경험을 나눠주고 싶은 선한 마음일 거다. 누가 뭐래도 좋은 마음이다. 그런 상황이 재밌기도 했다. 하지만 육아에 지치고 마음이 바쁜 어떤 날은 떨치고 도망가고 싶은 적도 있었다. 게다가 나에겐 폭풍 잔소리를 현란하게 구사하는 어마어마한 할머니가 바로 옆에 존재했다. 아! 나 옆엔 할머니가 너무 많아!


세월이 흘러 큰 애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됐다. 난 오래도록 간절히 원했던 분야에서 작가로 걸음마를 뗄 수 있게 됐다. 드라마 보조작가. 밤샘 회의도 불사하며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갑자기 의학적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기적에 가까운 임신이 나에게 찾아왔다. 내 나이 서른아홉... 나 어떡해. 일단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나... 나... "

"너... 너 임신했지?"

"어? 어..."

"너 나쁜 생각 하면 안 된다."

"... 할머니 도와 줄거지?"

"그럼 당연하지! 낳기만 해."



얼마 전 저녁 뉴스를 보는데 웬일인지 여성 앵커의 모습이 눈이 확 들어온다. 그러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어? 저 앵커 임신했나? 느낌 오는데! 이런 느낌은 혼자 간직하긴 아깝다. 작업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막내를 불러 이야기를 하니 막내는 아니란다. 배가 하나도 안 나왔는데 왜 임신이냐고 한다. 물론 배는 안 나왔다. 그런데 난 왜 자꾸 저 앵커가 임신을 한 거 같지? 얼굴이 그러니까... 확 피어났다고 할까? 윤기가 흐른다고 할까? 허리 라인도 아주 미세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과학적 근거는 하나도 없지만 임신일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다음 날도 엄청 중요한 뉴스가 줄줄이 나오는데 난 여성 앵커를 관찰하며 그녀의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너무너무 궁금해! 그리고 이 사안을 누군가와 수다로 풀고 싶은 열망이 올라왔다. 남편이 없어서 또 막내를 불러 아무리 봐도 저 앵커 임신 한 거 같다고 하니 막내는 곧 기말 시험이라며 제발 그만 좀 부르라고 한다. 여보세요? 거기 OOO방송국이죠? 혹시 저녁 뉴스 진행하는 그 여성 앵커 말이에요, 임신했나요? 물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꾹 참았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저녁 남편과 TV예능 프로그램을 보는데 바로 그 여성 앵커가 게스트로 출연을 한 것이다. 어찌나 반가운지! 그녀의 일상이 담긴 영상이 시작됐다. 방송사 메인 뉴스 진행하는 앵커가 자는 모습까지 공개하는 걸 보니 세상 참 달라졌다. 예쁘기도 하고 또 얼마나 똑똑한 여성인가? 임신을 한 건지 아닌 건지만 나한테 알려주면 좋겠는데... 하면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앵커의 남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자기 이제 18주 됐나?"


"헉!! 18주!!! 임신 맞네!! 내가 임신한 거 같다고 했거든!! 아아아아!!!!! 진짜 무슨 일이야!!

나... 생겼나 봐. 제3의 눈, 아기를 넷 이상 순풍순풍 낳은 할머니의 눈!!"

"그래... 축하해. 이 얘기 나 몇 번 들어야 해? 100번?"

"300번 각오해야지."


25년 전... 골목길에서, 시장에서 만났던 할머니들이 생각난다. 임신한 새댁의 배를 그토록 재밌어하던 할머니들의 마음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 거 같다. 잘했네. 잘했어. 방송사 메인 뉴스의 여성 앵커 자리 물론 대단하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생각한다면 아기도 낳을 수 있을 때 낳아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근데 한 명은 외로워, 아들이든 딸이든 둘은 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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