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불 추억
장마란다. 종일 비가 온다. 겨울 이불을 여름으로 바꾸는 일을 끝내서 다행이다. 날이 더워지면 교체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겠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단 시작 시점이 애매하다. 날이 더워졌다가도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는 일도 생긴다. 지구의 날씨는 매우 불안정하다. 겨우내 들은 소리가 4월부터 푹푹 찌는 여름이래요! 였는데 5월에도 추운 날이 있었다. 서늘한 새벽녘 포근한 오리털 속에서 따듯함을 느끼며 안도했다. 놔두길 잘했다. 일단 좀 더 덮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점점 기온이 올라가고 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날부터 이불이 침대 밖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막내의 방문을 여니 역시나 같은 상황. 저런 저런... 난 이불이 바닥이 떨어져 있으면... 가슴이 아프다. 얼른 집어 든다.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마치 추락했던 이불의 기억을 지우는 의식을 행하듯 강하게 툭 털어준다. 침대 위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창문을 보니 종일 햇살이 뜨거울 거 같다. 그래 시작해야겠다. 드디어 여름 이불로 바꾸기로 마음먹는다.
하루에 다 끝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건조기를 이용하지만 햇빛에 말리는 과정도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공간도 시간도 확보해야 한다. 일단 지금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는 큰 애의 빈 방과 막내 방을 먼저 작업하기로 한다. 오리털과 이불커버를 분리하고 오리털은 하나씩 건조기의 침구 털기 코스를 돌린다. 그리고 해가 잘 드는 곳에 행거를 놓고 하루 이상 널어둔다. 그리고 매트리스 커버와 침대 패드. 이불 커버, 베개 커버를 세탁기에 돌린다. 침대 패드는 건조기에 돌리면 안 되기 때문에 베란다 천장에 매달린 긴 건조대에 널어두고, 나머지 각종 커버들은 건조기에 돌린다. 물론 널어서 말릴 곳이 있으면 널어본다. 햇빛에 말리는 게 난 더 좋다. 매트리스도 하루 종일 비워둔다. 바람과 햇빛이 좋은 작용을 할 거라 믿는다. 하루 이상 널어둔 오리털은 세탁소에서 온 의류 포장 비닐봉지에 담아 공기를 빼고 똘똘 말아 테이프로 칭칭 감은 뒤 이불장 위 작은 공간에 꽉 채워놓는다. 다음 겨울이 올 때까지 모두 안녕!
며칠에 걸쳐 작업한 끝에 침대는 모두 여름 준비를 마쳤다. 얇은 이불과 시원한 매트리스 패드로 다 교체하고 나니 침대가 단출하고 시원해 보인다. 주부로서 대단히 큰 일을 한 거 같아 뿌듯하다. 그런데 문득 우리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코웃음을 쳤을 거 같다. 할머니의 이불 작업은 내가 한 일에 비하면 거의 대하드라마급이다. 일단 이불이 목화솜이불이다. 솜을 싸는 거대한 하얀 광목은 빨아서 풀을 먹여서 말려서 다듬이질을 한다. 나 다듬이질해 본 여자다. 일단 한 손으로 땅땅땅 땅 치다가 두 손으로 번갈아가며 땅땅땅 땅... 그리고 이불솜은 튼다. 솜을 튼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텐데 옛날엔 시장 어귀에 솜틀집이라는 간판이 달린 가게가 있었다. 오래 눌려 딱딱해진 솜을 기계로 작업해 가볍고 포근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이곳에서 솜을 틀어서 준비해 놓고, 다듬이질까지 해서 맨질맨질찰진 큰 광목천을 방에 쫙 펼쳐놓는다. 다음 그 위에 솜을 얹는다. 솜 위에는 솜 크기보다 살짝 작은 초록 빨간 비단을 올려놓고 바닥에 깔린 큰 광목으로 솜을 싸서 가운데 놓인 비단과 연결해 잘 꿰매준다. 긴 쇠바늘이 이불속으로 쑥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고 도 쑥 들어가고 나오고... 그때 할머니 손에는 작은 골무가 끼워져 있었다. 여름엔 그 광목 위에 삼베를 한 장 더 씌워 시원하게 연출을 하기도 했다. 솜이불이 깔리면 눈밭처럼 하얗다. 이불 위에 누우면 시원하다. 차갑기까지 하다. 아직도 그 느낌이 아련하게 기억난다. 하도 맨질맨질해서 잘 더러워지지도 않았다. 그 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많이 들었던 할머니의 잔소리.
"이불 밟지 마라." "이불은 밟는 거 아니다." "그렇게 질겅질겅 밟고 다니면 이불이 뭐가 되냐!"
당연한 말씀이다. 대하드라마 급으로 작업한 이불인데 그렇게 대접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 그래서 나 침대에서 이불 떨어지면 가슴이 아팠나? 나 요즘 할머니 생각을 많이 하나보다.
*이 그림을 본 건 2015년 2월 중앙 SUNDAY다. '유럽에서 들려주는 북한 미술전'이라는 전시회를 소개하는 기사였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 마네의 화집 속에 넣어두었는데 잘한 거 같다. 할머니의 고향이 함경도여서 그랬나, 아무튼 이 그림을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열린 방문으로 곱게 쌓인 이불이 보인다. 흰 고무신, 지팡이... 할머니의 천국은 이런 곳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