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들의 엘사 원피스
남편의 골프 엘보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한의원을 꾸준히 다니길래 차도가 있길 바랐지만 흐지부지, 정형외과 이곳저곳을 다니며 각종 주사를 맞더니 어느 날은 저주파를 맞았단다. 저주 파? 저 주파? 그게 뭐든 가능하면 몸에 좋은 걸맞고 다니라고 말해주었다. 집에서는 동전파스, 자석파스, 그냥 파스, 호랑이 연고 등 다양한 방법으로 팔꿈치를 돌본다. 어디 아프다고 하는 건 남자답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은데... 이 남자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무거운 것들 남편이 들어주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즘은 드는 꼴이 시원찮아 내가 알아서 한다. 요가하길 잘했다. 팔뚝에 전완근 나도 있다. 가끔 사용하던 남편의 팔베개도 더 고장 날까 봐 겁나 못쓰고 그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터져 나오면 또 팔꿈치가 아팠나? 쳐다보게 된다. 물론 골프를 안 치면 해결될 문제지만 업무의 연장으로 칠 일이 많아 보인다. 심지어 줄기세포 수술까지 받으며 골프를 치는 경우도 있다니 남편의 고민이 작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밝은 얼굴로 나에게 말한다. 무슨 팔찌를 차면 골프 엘보가 해결된다는 거다. 혹시 게르마늄 팔찌냐고 물어보니 아니 아니 아니란다. 무려 희토류 팔찌란다. 희토류... 내가 의심의 눈빛을 보내자 제품을 착용한 모델의 사진을 보여준다. 신뢰감 넘치는 눈빛과 완벽한 피지컬을 소유한 유명 배우가 희토류 팔찌를 차고 모든 신체의 고통이 사라졌다는 듯 행복하게 웃고 있다.
"자기 전공 금속재료공학 아니야?"
"그렇지."
"희토류가 그렇게 대단할 거 같아? 진짜 의학적으로 뭔가 해낼 거 같아?"
"효과 있데, 김이사가 효과 봤데. 혈액 순환을 돕기 때문에 두통도 사라진데. 네 이석증에도 효과 있을지 모르니까 원플러스 원 두 개로 살까? 당장 주문해??"
"나 아버님 생각나네. 건강 유튜브 보시고 무슨 융융 소금인지 용용 소금인지 사 오라고... "
"... "
가까스로 남편의 들뜬 마음을 억눌러놓았지만, 어느 순간 팔꿈치에 찌릿한 고통이 찾아오면 곧 그놈의 팔찌 타령이 또 시작된다. 오랜만에 집에 온 큰 애가 아빠의 희토류 팔찌 타령을 듣자 눈에 쌍심지를 켠다.
"아빠! 그 팔찌 차면 귀 얇고 사기당하게 딱 좋은 캐릭터로 보이는 거 알지? 차라리 애플워치 어때? 애플워치 차면 심혈관 질환, 뇌졸중 증상도 찾아주고 아빠 혹시 실종되면 119한테 위치 알려주고 아주 난리 나! 죽을 고비를 넘겨준다고!! 아빠 지금부터 검색해 봐, 아빠 그런 거 좋아하잖아!"
"... 하긴 전에 골프장에 경찰차가 와서 왜 왔나 했더니, 골프 치던 분이 카트 타고 가다가 애플워치 떨어뜨려서 그랬다더라."
"그러니까! 아빠 제발 그 팔찌는 너무......... 그러니까 한마디로 스마트해 보이지가 않아!!!"
"김이사가 분명 효과 있다고 했는데..."
남편이 말끝을 흐린다. 스마트해 보이지 않는다는 딸의 외침에 납득은 한 거 같은데, 왠지 모르게 서운해 보이는 저 표정. 마치 게임기 사달랬다가 거절당한 초등학생 남자아이 표정 같다. 설마 아저씨들 여럿이 모여 팔찌 효능 얘기할 때 우리 남편 속으로 나만 없어 희토류 팔찌! 그러는 건가? 그냥 사라고 할까 싶다가도 아니 희토류에 근육 관절통 없애주고 혈행 개선시켜 각종 심혈관 질환에 효과가 있는 어떤 성분이 있다면 이렇게 세상이 조용할 리가 있나? 그런데 이상한 건 그 팔찌회사는 대단히 유명한 배우를 모델로 쓸 만큼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거다. 사랑하는 가족이 "나만 없어 희토류 팔찌!" 할까 봐 그냥 사주는 건가? 하긴 막내사위가 사 온 용용인지 융융이지 그 문제의 소금병을 들고 흡족해하시던 아버님 표정이 생각난다.
막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시절, 아이를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면 거의 모든 여자 아이들이 엘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싸구려 소재에 조악한 디자인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그 획일성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에게 줄무늬 반팔 티셔츠와 귀여운 반바지를 입혔다. 뿌듯했다. 하지만, 아이는 늘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나만 없어 엘사 원피스!!! 노래를 불렀다. 결국 난 승복하고 말았다. 엘사 원피스를 입고 빙글빙글 돌며 행복해하던 아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확실한 건 그 희토류 팔찌가 아픈 팔꿈치를 치료하진 못하더라도 마음의 위안은 줄 수 있다는 거. 그런데 갑자기 궁금하다. 그 많던 게르마늄 팔찌는 어디에 있을까? 그 많던 엘사 원피스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