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부탱을 신는 여자 이혜정 2.
미리 만들어둔 반죽으로 수플레 팬케이크를 구워
후첸 로이터 드레스덴 모리츠부르크 디너 접시에 올렸다. 이 접시는 동화 같다.
사랑스러운 분홍 장미와 그 옆에 숲길에 피어있을 것 같은 잔잔한 야생화들을 보면
왠지 깊은숨을 쉬게 된다. 아름다움은 나에게 기쁨을 준다.
옆에 베이컨 두 장과 살짝 데친 노랑 빨강 주황 토마토를 담고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Andy Williams의 ‘A Summer Place’. 완벽한 아침이다.
너무 완벽해서 불안한, 그런 아침.
“아빠는 어디 갔어?”
“운동 갔겠지.”
“엄마 오늘도 학교 와?”
“아니, 엄마 오늘 모임 있어. 학교엔 내일 갈 거야, 왜?”
“엄마 학교 올 때, 제발 그 신발 좀 신지 마. 그 밑창 빨간 거”
“... ”
“애들이 엄마 신발 보고 킥킥대는 거 몰라?”
“안목이 거지 같으니까 그렇지. 크리스천 루브탱이 그 소리 들으면 울겠다.
아침 차렸으니까. 얼른 먹고 학교 갈 준비 해.”
“이게 다 뭐야... 씨발 짜증 나. 그냥 좀 평범하게, 안 돼?”
“... 욕은 좀... 안 할 수 없니?”
“씨발 씨발 씨발.”
“중2병은 무슨... 미친 거야 너.”
“씨발 짜증 나니까 그만하세요 진짜 개망신 안 당하고 싶으면.”
이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문이 열리며 남편이 들어온다.
순간 다혜의 표정이 싸악 바뀌며 아빠에게 달려간다.
“아빠! 운동했어?”
“응..”
“대박... 아빠 근육 완전 빵빵!!”
“멋져?”
“짱 멋져!”
“지금 학교 가는 거면, 아빠가 데려다줄까?”
“진짜?! 아빠 특강 내일이야 학교 오는 거 잊은 거 아니지? ”
"그거 벌써 몇 번 째냐... "
"... 난 아빠가 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복잡하게 심혈을 기울여 만든 느낌을 주는 독일 후첸 로이터 접시를 좋아한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코랄 접시는 좋아하지 않지만, 빈티지 코랄 중 블루 무늬가 들어간 접시만은 예외다.
나는 그 접시를 다섯 개 갖고 있다. 햄버거, 돈가스 같은 가벼운 음식과 잘 어울린다.
그런 음식은 후첸 로이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확실히 코랄 빈티지가 더 어울리는 거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5년 전부터 남편과 급격히 멀어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당시 특파원으로 미국에서 1년쯤 체류하던 중 그에게 일어난 일을...
하지만 끝까지 모른 척했다.
그는 알았을 것이다. 그 여자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는 걸
남편은 폐인이 돼 버렸다.
몇 달을 술에 절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알았다. 그냥 놀고 즐긴 사이는 아니었다는 것을.
어쨌든 두 사람은 늦게 찾아온 사랑이니, 운명이니 하며 어마어마하게 불타올랐던 모양이다.
나는 그 모습을 그냥 가만히 지켜봤다. 그래 내 남자는 그런 남자다.
나에게도 그런 남자였다.
그 여자를 정리한 이후에도 종종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거 같았다.
나랑 이혼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 같았지만, 그때 난 남편과 이혼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다혜가 다니는 초등학교 학부모 운영위원회를 맡고 있었다.
워낙 구도심에 위치한 학교라 어느 정도 낡고 지저분한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급식실 포크 숟가락 젓가락이 한 30년쯤 쓴 듯 낡아 있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머위나물, 비름나물, 그밖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산나물들이 반찬으로 나왔다. 아이들은 질색을 했다.
그게 교장 식성 때문이라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영양사는 교장선생님만 지나가면 알랑방귀를 뀌며 따라붙었다.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도 어쨌든 그 늙다리 교장은
애교가 폭발하는 영양사가 맘에 들었는지 보기만 하면
어깨를 토닥거리고, 등에서 허리까지 골고루 두드려댔다.
교직원 회식 자리에서 얼싸안고 브루스까지 췄다는 소문이 한동안 파다했다.
점심시간마다 교장실로 나물이 산처럼 쌓인 건강 식판을 날라대는 그 영양사를
자르기 위해 그 해 1학기는 진짜 정신이 없었다.
다혜는 파크로열로 이사 오기 전까지 나름 모범생이었다.
살던 동네 아이들이 워낙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대충 잘하는 아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학교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사를 와보니 역사가 60년도 넘은 이 초등학교에
압도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있었다.
거의 모든 시험에서 백점을 맞는 괴물 같은 아이였다.
선생님들의 눈은 늘 그 아이를 향했다.
어디서나 늘 주목을 받던 다혜는 그걸 견디지 못했다. 상대적 박탈감에 힘들어했다.
나는 다혜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원 알아보기도 바빴고, 학원 숙제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하면서 아이와 갈등이 심했다.
그 상황에서 이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주 수요일 남편과 어떤 여자가 찍힌 사진이 담긴 봉투가 집으로 배달됐다.
왠지 낯이 익는 여자였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 인간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만약 내가 아는 여자와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건 정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다.
드라마를 보면 이런 사진은 대부분 남편의 외도를 의심한 아내가
심부름센터 같은 곳에 의뢰를 해 찍는 건데, 솔직히 나는 그 정도로 남편에게 관심이 없다.
나와 딸의 인생이 그와 함께 쭉 흘러가길 바랄 뿐이다.
아마도 그 사진은 남편이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남편은 기자로 오래 일했다.
그런 사진 찍어 줄 사람이 주변에 널렸을 거다. 못 참겠으면 날더러 판 깨고 나가라는 그의 메시지다.
다혜 가슴의 못도 네가 박고, 자기는 그냥 조용히 이 판에서 빠지고 싶다는 천상천하
최고 악질의 이기적인 인간이 바로 남편이다.
갑작스러운 벨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이 시간에 벨을 누를 사람이 없는데,
문 밖을 보여주는 모니터 화면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다.
“누구세요?”
“저 앞집인데요, 혹시 전동드라이버 있으세요?”
“아 네. 있긴 한데... ”
“그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1년 전 즈음 이사 온 앞집 여자가 가끔 벨을 누른다.
가끔 음식을 나눴는데 요즘 들어 벨을 누르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전동 드라이버를 찾아 건네주었다.
그런데, 가끔 느끼는 건데, 이 여자 나를 보는 눈이 좀 이상하다.
기분이 나쁘다.
남편의 특강이 끝나면 아이들이 함께 먹을 간식 테이블을 준비해야겠다.
다혜가 제일 좋아하는 행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