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부탱을 신는 여자 이혜정 1.
[결혼 22년 차 46세, 이름 이혜정]
파크로열이 최고급 아파트를 지향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감동한 부분은 바로 욕실이다.
모델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수령이 100년 이상 되는 편백나무로 제작했다는
히노끼 욕조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물을 채우면 피톤치드 향이 욕실 가득 퍼진다.
잘 붓는 체질이라 반신욕을 자주 하는 편인데, 늘 욕조 표면의 그 차가운 느낌이 싫었다.
하지만 이 욕조는 감촉이 부드럽고, 따듯하다.
예전엔 미드나잇 재스민 향초를 켜고 반신욕을 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은은하게 퍼지는 편백나무향 때문에 향초도 필요 없다. 완벽한 반신욕이다.
파크로열 입주가 시작되면서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골목골목 희한하게 이어진 길이 흥미롭고, 여기저기 남아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풍기는
구도심의 정취가 마음에 들었다.
문 연 지 50년 된 유명한 중국집이라고 해서 갔더니 가게가 거의 쓰러질 듯하다.
주문한 짬뽕을 테이블에 놓아주는 주인아줌마의 엄지가 국물에 빠졌다 나온다.
불에 탄 흔적까지 있는 앞치마를 두르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다니며 자신의 엄지를 담근
짬뽕을 서빙하고 있다. 그래도 다시 가보면 늘 먹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 길다.
어쨌든 그 집 탕수육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어본 탕수육 중 최고였다.
이사 온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처음엔 전학을 온 다혜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 시작한 초등학교 운영위원회
활동이 중학교까지 이어졌다. 지친 것 같기도 하고 이래저래 모르면 좋을 일도 다 알게 되니 골이 아프다.
학교 급식 신문고에 김치가 맛없다는 아이들 의견이 또 올라왔다.
분명히 납품업체를 방문해 김치 만드는 과정까지 확인했다.
만들고 익을 때까지 시간을 주기로 분명히 약속을 받았는데, 무슨 문제일까?
중학생 아이들 입맛이라는 게 뻔하다. 김치가 익으면 맛있고, 생지면 맛없는 거다.
그 입맛을 못 맞춘다면 영양사로서 자격미달이다. 가뜩이나 밍밍한 급식 반찬들 익은 김치가 옆에서
도와줘야 씹어 넘길 텐데 어른이라면서, 전문가라면서 그런 사소한 일들 하나 제대로 챙기질 못하니
내가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거다.
분명 교장의 짓일 거다.
전에도 자신의 지인이 운영하는 김치업체로 몰래 바꿨다가 나한테 들켜 망신을 당했다.
은퇴를 앞둔 교장은 뭐 하나라도 더 챙겨서 은퇴를 하려는 건지 눈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었다.
학교를 위해 뭐 좀 해보려고 하면 사사건건 힘을 보태며 헛발질이다.
혹시 내가 학부모 운영위원회를 맡으면서 교장 교체를 건의했다는 사실을 어디서 주워들은 건가?
솔직히 중학교 3년 금방 지나간다지만, 이런 암적인 존재를 학교에 계속 두기는 싫은 거다.
공부하느라 바쁜 아이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이상한 토크 콘서트를 진행한다며
오만 잡소리에 잔소리에 자신을 영웅시하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꼴을 더 이상은 봐주기 힘들다.
그뿐인가? 지난주 운영위원회 회의 때 뜬금없이 이런다.
“작년부터 부동의 전교 1등인 아이가 있던데, 박선주라고. 그 아이 엄마는 이 자리에 안 계시네요?”
그 말은 해석하면, “니 딸은 전교 1등도 아닌데 왜 그렇게 설치세요?”다.
그동안 내가 학교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세운 공이 얼만데,
김치업체 하나 맘대로 못하게 했다고 저렇게 나와 각을 세운다.
지난번 교육청에서 따낸 방과 후 학습 지원 사업 예산은 아직 집행도 안됐다.
교장에게 멱살이라도 잡힌 기분이었다. 솔직히 내 아이 성적을 언급하며 자존심 거드는 건
악질 중에 최고 악질 선생이 하는 짓거리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맡은 선생들도 그런 짓을 한다.
예전에 살던 동네 초등학교 선생님은 우리 다혜가 다람쥐를 못 쓴다고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다.
다음 날 바로 학교로 달려가 선생님께 고급 향수를 선물했다. 지방시 블룸.
그 이후부터 다혜는 회초리를 맞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교장실을 드나들며 철철이 바꿔가며 올려놓은 고급 머그컵을 몇 개인지
그게 얼마짜리 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내 아이 성적을 언급하며 망신을 줘?
그 인간의 주제라는 게 그 정도다.
교무실 옆 탕비실에는 온갖 고급 티백 커피와 차를 채워두었다.
솔직히 그거 먹는 인간들이 그 티백에 담긴 의미나 아는지 모르겠다.
작년부터 갖다 둔 티백 브랜드는 밍스 차인데, 티백 하나가 팔릴 때마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물을 기부하는 브랜드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눈치다.
하긴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상한 무늬가 가득한 싸구려 넥타이에 엉덩이 쪽은 늘 반질반질,
언제 세탁을 했는지도 모를 냄새나는 바지를 입고 다니는 주제에 교장이랍시고
내 아이 성적을 운영위원회가 다 모인 자리에서 언급하다니.
저 능구렁이를 어떻게 처단할지 도무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에 보란 듯 다혜가 전교 1등을 딱 찍으면 좋겠는데, 힘들 거 같다.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시키면 애가 매번 시험에서 100점을 맞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항상 전교 1등, 시험은 거의 100점. 틀려봐야 한 개 정도 틀리는 그 박선주라는 아이가 궁금한 이유다.
며칠 전 카페 창가에 앉았다가 지나가는 선주 엄마를 본 적이 있다.
콩알만 한 바퀴가 달린 싸구려 유모차에 네댓 살 남짓 돼 보이는 아이를 태우고 정신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옷부터 신발 가방 뭐 하나 세련된 게 없었다. 그 안목으로 어떻게 딸을 전교 1등으로 키운 건지...
하지만 선주 엄마에 대해 인상적인 기억이 하나 있긴 하다.
학기 초에 그 여자와 하교 도우미를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신발로 갈아 신지 않고 실내화 바람에 교문 밖으로 튀어나가는 것이 거슬린 교장이
만들어낸 학부모 노동이었다.
두 명의 학부모가 매일매일 노란 조끼를 입고 현관 앞에 서서 지도를 하는 데도,
많은 아이들이 신발로 갈아 신지 않고 그냥 튀어나갔다.
얼굴이 익숙한 다혜 친구들을 보면 장난처럼 윽박지르며 “신발 갈아 신어야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늘한 표정으로 나오는 아이들에게는
그런 말도 쉽게 건네기 어려웠다.
“아이들이 기다려주질 않네요.”
“네? 뭘 기다려요?”
“친구가 실내화 갈아 신는 거... 기다려주면 좋을 텐데.”
선주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뭔가 밝고 매력이 넘쳐 보이는 아이가 몇 명의 무리를 이끌고 나오는데,
그 아이가 신발을 갈아 신는 동안 모든 아이들이 급히 신발을 갈아 신는다.
늦게 갈아 신는 아이를 기다려주는 분위기는 없었다. 언제라도 너를 버리고 갈 수 있어!라고 하는 듯했다.
왠지 씁쓸했다. 아이들이 정말 힘들게 학교를 다니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주 엄마는 그런 걸 보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착하고 싶어 안달 난 거 같은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었다.
선주는 앞으로도 다혜의 열등감을 지속적으로 자극할 아이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로 이런 관계를 포장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나는 둘이 아예 안 보면 좋겠다.
다혜가 선주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게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가.
선주 엄마를 이번 브런치 모임에 초대한 건 솔직히 간을 보기 위함이다.
그 착한 눈으로. 허접한 스타일로 과연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욕조의 물이 식는다. 슬슬 일어나 아침을 차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