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 이야기

에코백을 든 여자 김선영 5.

by 임지원

5.


다혜의 생일날이다.

다혜와 친한 파크로열 친구들 몇 명이 모여 쑥덕인다.

다혜의 생일선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다. 뭔가 계획을 세우는 거 같았다.

다혜도 그 친구들도 나에게는 그 생일 계획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 가방에는 이미 다혜의 선물이 들어있었다. 비즈공예로 직접 만든 팔찌다.


점심시간에 급식실에서 배식을 받던 중 다혜와 눈이 마주쳤다.

다혜는 나를 빤히 보더니


"내 생파에 오고 싶으면 이따 우리 집으로 오든가."


그 한마디에 내 기분은 지옥에 처박혔다. 심지어 주변의 친구들이 낄낄대며 웃는 거다.

화가 났다. 그 상황을 외면하고 싶었다. 피하고 싶었다. 무작정 급식실을 나와 버렸다.


운동장에 서 있자 막막했다. 점심은 안 먹는다 해도 다시 교실로 들어가려니 왠지 겁이 났다.

하늘을 바라봤다. 머리가 띵해왔다. 교문이 보였다.

지금 저길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다혜와 그 낄낄대던 친구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실내화를 신은 채, 교문을 나왔다. 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고... 걷다 보니

그냥 자연스럽게 파크로열 아파트 단지 안의 산책길이었다. 참 이상한 동네다.

그렇게 나는 단지 내 숲길 안쪽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낮 12시 즈음 교복을 입은 중학생 여자 아이가 아파트 단지 내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하겠지만 그래도 그냥 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다혜를 만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전학을 온 다혜는 귀여운 파마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 애가 먼저 나에게 쪽지를 보냈다.


[우리 친구 할래? 네가 맘에 들어]


우리 집에 놀러 온 다혜는 당시 한창 귀여움을 떨던 동주가 귀엽다고 안아주기도 했다.

동주 같은 아이를 낳고 싶다고도 했다. 엄마가 만들어 준 떡볶이를 좋아했고,

가끔 짜장 라면을 끓여달라고도 했다.

나도 다혜 덕분에 멀리서 보기만 했던 파크로열에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현관이 우리 집 화장실만 했다. 가운데 기둥이 있는 완전 으리으리한 거실과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있던 다혜 엄마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다.

다혜 엄마는 떡볶이가 아니라 완전 처음 맛보는 잼이 발린 샌드위치를 만들어주셨는데,

거기서 먹은 다음 그 잼이 TV에 나와 깜짝 놀랐다.


작년 여름방학, 나는 왕도 수학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엔가 수업을 마치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하향 버튼을 누르고 서 있는데

살짝 열린 비상구 문 쪽 에서 큰 소리가 났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비상구 문을 열고

소리 나는 곳을 바라봤다.


한 층 위 계단참에 서 있는 건 다혜와 다혜 엄마였다.


갑자기 다혜 엄마가 다혜의 뺨을 찰싹 때리며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뺨 때리는 모습에 나는 너무 놀라 소리까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늘 다정하고 우아한 아줌마라고 생각했는데 다혜가 불쌍했다.


거칠고 날카롭게 비상구 계단을 울리던 다혜 엄마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고

잠시 이어진 침묵. 나는 급히 비상구 문을 닫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왔다.

잠시 후 다혜가 그 비상구 문을 열고 나왔다.


“야, 박선주.”

“어?..."

"너 봤지?"

"뭐.. 뭘?"

"봤지? 봤으면 봤다고 해!"

"어... 봤어.”

"... 씨발."

"괜찮아?"


다혜는 대답도 없이 그냥 가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서먹해졌다.

나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엄마들은 종종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폭발한다.

우리 엄마도 그렇다. 다혜도 나와 비슷하게 사는구나

조금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혜에게 더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다혜는 사사건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집요하게 내 주변의 친구들을 빼앗아 갔다. 겉으로는 친한 친구인 척하면서 뒤통수를 쳤다.

친구들 앞에서 은근히 나를 무시하며 또 친한 척을 했다. 그런 다혜를 어떻게 할 수 없어 괴로웠다.


따스한 햇살 때문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어젯밤에도 수학 문제집을 푸느라 새벽이 돼서야 잠들었다. 점점 눈이 감겼다.


“너 동주 누나 아니니?”


누군가 나를 깨운다. 눈을 떠 보니 놀이터에서 동주와 함께 논 적이 있는 아줌마다.

카를로라는 골든 레트리버를 데리고 다닌다. 아줌마가 내 옆에 와서 앉는다.

나는 카를로를 보자 왠지 마음이 포근해졌다.

카를로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카를로를 안아보았다.

고소한 냄새, 따뜻하고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야?”

“네...”

“중학교 2학년이라고 했나?”


아줌마랑 엄마의 나이가 비슷할 거 같다. 하지만 엄마와는 많이 다르다.

말하자면 아줌마는 다혜 엄마 쪽에 가까운 종족이다.

옷과 신발과 모든 것은 늘 고가의 명품들이고, 늘 여유로운 미소, 심지어 머리카락과 피부,

종아리 근육도 엄마와는 다르다. 이 아줌마의 정체는 뭘까?

왠지 모르게 동경하는 마음이 일었다.


“무슨 일 있니?”


아줌마의 질문에 불쑥 다른 게 궁금해졌다. 어쩌면 볼 때마다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같은 날 한 번쯤 용기를 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줌마는...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됐어요?”


내 질문에 아줌마는 살짝 미소를 지은 거 같았다.


"네가 지금 왜 여기 있는지 알려주면, 아줌마도 얘기해 줄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엄마 아빠가 돈이 없어서 빌라에 살고, 그 바람에 파크로열 친구들이

나 놀리는 재미에 정신줄 놨다고 말할까. 그냥 일탈 좀 해봤다고 말할까.

이때 무슨 냄새가 났는지, 소리가 들렸는지 카를로가 갑자기 짖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줌마는 나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고 가셨다.


그래도 내가 만든 팔찌를 선물하고 싶었다.

종례시간에 나를 보는 다혜의 눈이 조금 착해진 거 같기도 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 끝나고 다혜 집 근처로 갔다.

근처를 빙빙 돌다가 용기를 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맨 꼭대기 23층. 전에는 자주 놀러 왔던 친한 친구의 집인데,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까.

벨을 누르려고 하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나중에 다혜와 둘이 있을 때 주는 편이 낫겠다 싶어 그냥 돌아섰다.

그 순간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택배기사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급히 내렸다.

그리고 아파트 호수를 확인한 남자는 문 앞에 서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선뜻 봉투를 주고

바로 타고 온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눈 깜짝할 새 내 손에는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일정이 바빴나 보다 하며 문 앞에 봉투를 내려놓으려는데, 봉투가 이상하다.

발신자도 없고, 수신자도 없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가 받은, 내 봉투 같았다.


이때,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얼떨결에 비상구 쪽으로 나가 몸을 숨겼다.


다혜 엄마와 다혜네 앞 집에 사는 사람이 동시에 문을 열고 나와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잠시 후, 다혜네 앞 집 현관문이 닫히고 다혜 엄마는 또각또각 몇 걸음을 걷더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다혜 엄마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자기야. 어어 그러니까. 암튼 선주 엄마.. 이제 안 나오겠지. 오늘 그렇게 당했는데...

그러니까.. 착한 거야, 모자란 거야. 나 엘리베이터 타 나중에 통화해. 어어~ "


엄마가 어떤 일을 당한 걸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다혜 엄마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다음, 계단을 내려왔다.

문득 손에 든 봉투를 살피는데, 대충 풀로 붙인 듯 봉투가 쉽게 입을 벌린다.

봉투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것은 인화된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놀랍게도 카를로와 그 아줌마, 그리고 다정하게 웃고 있는 중년 남성이 있었다.

사진 속 중년 남성의 얼굴을 찬찬히 봤다. 이 남자는 다혜 아빠? 그렇다 분명 틀림없는 다혜 아빠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빠 특강 온 다혜 아빠도 봤고, 다혜네 집에 놀러 갔을 때도 봤다.

왜 다혜 아빠가 이 아줌마와 있는 거지? 또 다른 사진은 어떤 건물 주차장인데,

함께 차를 타는 두 사람의 모습이다. HOTEL... 호텔 주차장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거 같았다.


잠시 망설였다. 이 봉투를 다시 다혜네 집 앞에 두고 올까도 싶었다.

그러다 그냥 사진이 담긴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계단으로 1층까지 내려왔다.




“우리 선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만약 아빠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면 엄마 어떨 거 같아?”

“아빠가? 그럴 거 같진 않은데, 뭐 아빠 수상한 짓 하는 거 봤어?”

“아니 만약에! 엄마 만. 약. 에. 뜻 몰라?”


“아빠가 바람을 피운다. 만약에. 그럼 아주 그냥 머리털을 다 뽑아버리지!

바람은 뭐 아무나 피우니? 아빠 그럴 주제 못돼. 걱정 마.”


"그래도 만약 그러면 속상하겠지? 불행하겠지?”

“그럼 당연하지. 아휴... 딱 죽고 싶겠다.”


하루키를 읽던 여자들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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