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물어봐도 돼요?

에코백을 든 여자 김선영 4.

by 임지원

4.


오전 브런치 모임에서 왜 그렇게 멍청하게 굴었을까.


매일 아이하고 집 안에서 지지고 볶다 보니 이렇게 바보가 된 거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아니 그냥 아무 말 않고 앉아만 있어야 했다.

뭐 대단한 게 있긴 있나 봐 냄새만 풍겼어야 했다. 신경질이 났다. 잠시 소파에 누웠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깐 눈만 감은 줄 알았는데, 깨어나 보니 2시였다.

아, 이럴 수가. 심지어 등원한 둘째 날이다. 그냥 그대로 신발만 신고 뛰쳐나왔다. 유치원을 향해 달렸다.

엄마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 하원하는 아이를 받는 일이다. 절대 늦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미 30분이나 늦었다. 이 엉망이 된 하루를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까. 다혜 엄마가 너무 미웠다.

화가 났다. 정신없이 달렸다. 정문 앞에 도착하니 아이가 운동장에서 놀고 있다.

선생님은 굳은 표정으로 노는 동주를 바라보며 서 있다.

엄마라는 사람이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와야 하는 책임을 망각하고 정신없이 달려와

헉헉대는 꼴이라니... 선생님의 짜증 붙은 한숨이 느껴진다.

입 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지만, 눈은 정색을 하며 처음이라 잘 모르시는 거 같은데,

아이를 제시간에 데리러 오시는 일은 엄청 중요한 거고,

어머님이 늦으시면 제 손길을 기다리는 다른 아이들이 케어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며

다음엔 시간을 꼭 지켜 달라는 긴 잔소리를 던지고 돌아선다.

그 차가운 뒷모습에까지 굽신굽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끝내 선생님은 괜찮다는 말 한마디, 따듯한 미소 한점 없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휴우... 한숨이 나왔다.


얼른 집으로 가 청소기도 한번 돌리고 저녁 준비도 하면 좋을 텐데,

아이는 좋아하는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터에서 놀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고집 꺾을 방도가 없다. 결국 아이와 놀이터에 도착했다.

오후라 그런지 이미 많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

삼삼오오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엄마들이 보인다.

미끄럼틀이 보이자 동주는 내 손을 놓고 휙 달려가 버린다.

나는 이미 자리 잡은 무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발목까지 내려오는 블랙 롱 원피스에 새빨간 립스틱을 발라 시선을 끄는 한 엄마가

커다란 유모차를 끌고 등장하자 무리 지어 있던 엄마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며 반긴다.

왁자지껄한 무리 옆에 혼자 앉아 있자니 쓸쓸했다.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이곳에 아무도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피 한잔, 같이 할래요?”

"네? 아... 네..."


놀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던 여자다. 카를로라는 멋진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닌다.

개를 좋아하는 동주 때문에 조금 안면을 튼 낯선 이웃. 나에게 테이크 아웃해 온 커피를 건넨다.


“고마워요.”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귀신 봤어요?”

“... 그래 보여요? 진짜 귀신이시네.”


왠지 내 마음속을 들어다 본 것처럼 말한다. 아무튼 옆에 누군가 앉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역시 혼자보다는 ‘같이’가 안전하다.


“난 정미현이에요”

“...?”


놀이터에서 가끔 마주친 또래 여자가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다.

몇 년을 누구 엄마라 부르며 지내면서도 끝내 이름을 알지 못한 채 이사 가는 일도 있으니까.


“이름 물어봐도 돼요?"

“난 김선영.”


카를로가 꼬리를 흔들며 우리 주변을 맴돈다. 동주는 그 사이 친구 하나를 만들었다.

이젠 미끄럼틀은 쳐다보지 않고, 친구와 둘이 놀이터 구석에서 돌덩이를 옮기며 종알종알

대화 비슷한 걸 하면서 분주하다.

정미현이라는 여자와 이런저런 동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스르르 마음이 풀렸다.

새로 생긴 상가 건물 2층 핑크 내과 의사와 1층에 있는 보람 약국 약사가 부부란다.

눈앞 세상이 달라져 있다. 행복 옆에 불행 같던 내 모습이, 행복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온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고 다시 도서관으로 가는 선주를 따라 집을 나왔다.


“혼자 갈 수 있는데.”

“... 같이 좀 걷자...”

“왜 또 이래...”


“... 요즘도 다혜가 힘들게 해?”

“... 아니. 오늘 모임은 어땠어? 은근 기대했잖아."

"... 괜찮았어..."

"뭐야? 표정 뭐임? 오늘 기분 나빴구나.”

“무슨 소리야! 나 전교 1등 엄만데 다들 친해지고 싶어서 난리 났지!”

“뻥 치네. 다혜 아줌마 엄청 못되게 굴었지?”

“이야... 너 어떻게 알았어? 귀신이네."

“그러니까 가지 말라니까.”


“은근 무시하더라. 너 요즘 힘들었지? 미안해 엄마가...

너한테 든든한 버팀목 돼줘야 하는데, 그것도 못하면서 육아 스트레스나

너한테 풀고 미안하다고 했다가 소리 꽥꽥 질렀다가... 엄마 미친년 같아.”


“... 엄마 그 다혜 아줌마 말이야, 엄마보다 불행할걸.”

“에이 솔직히 그건 아니다. 그 여자 입은 그 원피스... 그거 얼마 짜린지

모르겠는데 진짜 예쁘더라. 꽃이 화사해. 가방도 TV에서 본 거 같고

천만 원도 넘는다는 그 가방 같던데?”


“그 아줌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넌 알아?"

"... 좀 알아. "


선주가 알고 있는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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