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스펙

루부탱을 신는 여자 이혜정 3.

by 임지원

3.


“저는 집도 좀 치우고, 둘째 아이 데리러 가야 해서 갈게요.”

“그러실래요? 그럼 다음에 또 봬요.”


선주 엄마는 다음에 또 보자는 제안에 끝까지 답을 안 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선주 엄마가 먼저 가버린 후, 우리는 2차로 추어탕으로 점심까지 해결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그 여자는 착해 빠졌다.

그동안 아이 키우며 집에 있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냥 아이 키우는 거 힘들다는 푸념 한 마디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안쓰러워 나도 울 뻔했다.

선주가 왜 그렇게 깊은 눈을 뜨고 철든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겠다.

엄마가 힘들면, 아이는 빨리 철이 든다.


솔직히 그동안 우리 다혜 힘들게 한 게 얄미워 좀 못되게 굴었다.

전교 1등 엄마라면 원래 그렇게 시기 질투 좀 받고 그러는 거다.

이제 둘째 아이 유치원 다니기 시작했으면 학교 행사나 학부모 봉사 활동에 전교 1등 엄마라며 얼굴 내밀고

할 텐데, 그러다 능구렁이 교장한테 포섭되면 분명 이렇게 저렇게 이용될 게 뻔하다.

그 여자 순진해 빠진 거 교장이 눈치 못 챌 리 없다.

차라리 나한테 큰 주사 맞고 정신 바짝 차리면, 오히려 다행인 거다.


게다가 선주는 전교 1등 프리미엄 다 누리는데, 그 엄마는 지 둘째 아이 키운답시고

학교 힘든 일에 얼굴 한 번 비춘 적이 없다. 우리 운영위원회 엄마들 선생님들 수업 발표 보러 장학사 왔을 때, 주차 관리까지 했다. 몸 쓰는 건 솔직히 일도 아니다. 먼지 먹어가며 교실 청소해 주고 예민하신 선생님들

비위 맞추느라 다들 얼마나 힘든지 선주 엄마는 모를 것이다.


솔직히 당한 사람도 잠 안 오겠지만 나도 께름칙하다.

어쨌든 내 코가 석자다. 아무리 육아 우울증 말기래도

남편이 외도하는 사진을 배달받는 나보다는 행복할 것이다.


학교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학교? 학교에서 왜 전화를? 학교에서 걸려온 전화는 엄마의 심장을 덜컹하게 한다.


“네? 다혜가 선주를... 패요? 그러니까 때렸다고요?”


학교에 도착해 보니 꽤나 거칠게 싸운 듯 두 아이는 옷이고 머리고 다 엉망진창이 된 상태였다.

그래도 여자 아이들인데, 저렇게까지 치고받고 싸울 일이 뭐란 말인가?

선주는 교복 어깨가 찢어진 채로 코피까지 흘리고 있다. 다혜는 분명 선주보다 멀쩡하다.

그런데 왜 다혜 표정이 저렇지? 뭔가 굉장히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확실히 선주보다 다혜가 제정신이 아니다. 교장이 정색을 하며 말한다.


“다혜 어머니, 이거 이거 어떡합니까?

다혜 학생한테 이렇게 폭력적인 면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누가 보면 선주 친할아버지인 줄 알겠다. 이것도 선주가 누리는 전교 1등 프리미엄인가?

어쨌든 이 상황에서 선주가 피해자로 보이는 건 당연하다. 변명할 여지도 없다.

하지만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까지 애가 돌아버린 건지.

다혜가 선주를 오랫동안 질투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까지? 아빠를 실망시키는 일은

절대로 할 아이가 아니다. 누군가를 때릴 아이는 아닌 거다.


“죄송합니다. 선주 많이 다친 거 같은데... 아줌마가 미안해. 가까운 병원이라도 가서...”


이때, 교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선주 엄마가 달려왔다.

선주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또 펑펑 울기 시작이다. 돌아버리겠다.

저 여자, 육아 우울증 확실하다. 뭔가 어마어마한 분노를 터뜨릴 거 같다.

차라리 그러면 좋겠는데, 그걸 또 꿀떡 삼킨다. 답답해 죽겠다.

선주 엄마의 눈물로 왠지 분위기는 엄숙해졌다.

그 와중에도 다혜는 끝까지 선주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선주의 표정이다.

저렇게 맞았으면 억울할 법도 한데, 다혜가 사과를 않고 버텨도 그냥 가만히 있는 거다.

반면 모두가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데도 다혜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분이 남은 듯 으르렁댄다.

무려 교장선생님이 심문을 하는 데도 왜 싸웠는지 둘 다 말을 안 한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중학교 들어가고 애가 많이 이상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폭력 관련 사고를 친 건 처음이라

나도 다혜 눈치가 보였다. 아빠한테 말하지 말라는 말만 남긴 채 다혜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편은 급한 취재가 생겼다며 오늘도 집에 안 들어왔다.

간단히 먹을 수 있게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다혜의 방에 넣어주었지만 입도 대지 않는다.

끝장 볼 각오로 다그쳐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왠지 오늘은 나도 그럴 힘이 없다. 그냥 놔두었다.

혹시 몰라 브런치 모임 톡방에 오늘 학교 다녀온 아이들이 집에 와서 뭐 하는 말 없냐며 톡을 남겨놓았는데,

이상하게 아무 답도 없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며칠을 기다리다 결국 커피공장에서 브런치를 먹자고 연락을 했다.

약속 시간을 앞두고 반신욕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톡방 멤버 모두를 모으면 괜히 소문만 더 크게 날 거 같아 다혜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 두 명 엄마만

살짝 연락을 했다. 다혜는 결국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눈에 서슬이 퍼런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혼이 났는데, 또 사고 치진 않겠지.

나한테는 몰라도 아빠에게는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아이다.


카페로 들어서는데, 나를 보는 두 엄마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

평소와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뭔가, 거슬린다. 두 사람의 기분이 왠지 좋아 보인다. 내 착각인가?


“언니, 제가 먼저 연락을 드릴까 생각 안 한 건 아닌데... 이게

톡으로 할 얘기도 아니고 아직 모르시죠? 선주랑 다혜가 왜 싸웠는지”

“자기들 서운하다. 연락을 줘야지. 뭐 들은 거 있어?”

“이걸 언니한테 말할까 말까 우리, 고민했잖아요.”

“뭔데?”

“사진”

“사진? 선주가... 다혜랑 친구들 몇 명 있는 톡 방에... 사진을 올렸는데

보실래요?”


사진이라... 혹시 그 사진? 그래서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거였어?


“아니. 됐어 뭘 봐 사진이 사진이지.”

“언니도 알다시피 다혜가... 엄청 파파걸이잖아요. 아빠 엄청 자랑스러워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나 봐요. 근데, 선주가 그 사진을 어떻게 갖고 있을까요?

호텔 주차장 사진까지 있더라고요!”


“자기들... 바보야? 요즘 합성사진 만드는 게 얼마나 쉬운데.”

“네?”

“우리 남편 은근 유명하잖아. 얼굴이 스펙인 기자 몰라?

책도 내고 잘 나가니까 주변에 질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받았어. 그 사진들. 모함이야.

우리 남편이 뭐가 아쉬워서 그러고 다니겠어.”


“합성 같아 보이진 않던데.”

“합. 성. 이. 야.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걸 선주가 주운 모양이네.

그렇잖아도 그 사진 때문에 명예훼손 건으로 고소한 상태야.”


“고소요?”


분위기 파악 못하고 설치는 엄마의 옆구리를 다른 엄마가 쿡 찌른다.

그제야 입을 다문다. 고소한다니 겁이 좀 나는 건가. 이제 알겠다.


왜 다혜가 선주를 그렇게 두들겨 팼는지. 왜들 그렇게 입을 꾹 다물었는지.


아무 일 없는 듯 브런치를 함께 먹었다. 그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졌다. 비참했다. 알고 있다.

너희들은 내가 자빠지길 기다린 나쁜 인간들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 내가 헛발질하며 미끄러진 것이 내심 고소할 거라는 걸.

어쩌면 그런 꼴이 보기 싫어 그토록 행복한 척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남편은 세상 최고로 다정하며 능력이 있어서 나는 명품을 턱턱 산다! 심지어 그는 딸 바보다!

입에 모터를 달고 자랑한 것이 후회스럽다.

결혼하고 나면, 여자의 스펙은 가정이 된다.

특히 남편이 근사해야 한다. 근사한 남편을 중심으로 가정이 잘 굴러가야 한다.

경제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최고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우리네 가정은 그렇게 잘 굴러가지 않는다.

좋은 남편도 이기적이다. 나쁜 남편은 말할 것도 없다. 시댁은 어이가 없다. 좋은 시댁은 없다.

애들은 성적 때문에 미쳐간다. 내 몸은 피곤하고

좋다고 늘린 아파트 평수 때문에 매일매일 청소와 정리로 하루가 다 지나간다.

그래도 가끔은 행복했다. 저녁 식탁에서 다 같이 밥을 먹을 때,

남편이 다혜에게 기자로서 겪은 경험담 같은 걸 들려주며 응원할 때,

다혜가 엄마 했을 때, 걸었을 때, 학교 시험 100점 맞고 좋아했을 때.

남편이 날, 언젠가는 사랑할 거라 믿었을 때...


“자기들 알지 그 사진, 합성 아닌 거.”

“아니 아니... 합성 맞아요. 언니 그 얘기 그만해요.”


“... 결혼 전에는 몰랐는데, 남편이 나쁜 놈이더라고. 그렇다고 이혼을 어떻게 해.

우리 학교 일은 좀 많았어? 중간고사 끝나면 바로 기말고사인데 다혜한테 이혼한다고 할 수가 있나.

그럼 걔 공부 어떡해. 다혜 욕심 많은 거 알지? 명성 외고 가고 싶다고 난리인데,

영어시험 딱 한번 실수도 용납 안 되잖아.”


“... 자기... 좀 멋지다."


세희 엄마다. 가깝게 지내도 늘 조금씩 날 질투하며 신경을 건드리는 여자. 웬일로 날 더러 멋지단다.


"... 언니는 그래도 얼굴이라도 뜯어먹고 그냥 살아요. ”


이러다 우정반지라도 맞추게 생겼다. 왠지 정말 친구가 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이때, 우리의 시선이 카페의 유리 통창 밖 한 여자에게 쏠렸다.

어딘지 낯이 익는 얼굴이다. 앞에 있는 자전거 거치대에 커다란 개를 매어 두고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 그 여자? 그 여자네.. 어머 어머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언니 저 여자 얼굴 봤... 어요?”


멍했다. 설마 했는데 그 인간이 같은 동네에 사는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나쁜 놈인 건 알았는데, 그냥 나쁜 놈 정도가 아니라 허우대만 멀쩡한 쓰레기였다.

외도가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그래도 설마 인간이 그럴 수가 있나 했다.

그래도 남편은 기자니까, 마음이 뜨거워서, 감수성이 특별해서 종종 사랑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마저도 나의 망상이었던 걸까?



이전 08화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