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처럼

루부탱을 신는 여자 이혜정 4.

by 임지원

4.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다혜를 차에 태웠다.


며칠 째 말도 안 하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저러고 있으니 얼굴이 말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 지하 1층에 차를 주차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했다.

명품 매장이 줄 서 있다. 내가 좋아하는 구두 크리스찬 루부탱 매장이다.


어쩜 이렇게 선이 예쁠까. 12센티의 저 가느다란 힐이 너무나 곧다. 완벽하다. 그러면서도 안정감을 준다.

마음속 불안감이 사라진다. 다혜는 표정은 지루하지만, 웬일로 순순히 나를 따라온다.

아빠의 외도를 알고 나니 엄마가 불쌍해진 건가?


이번엔 티파니 매장에 들어갔다. 마치 어린이가 그린 것 같은 꽃에 보석을 박았다.

사진으로 봤을 땐 장난스럽다고 느꼈는데 직접 보니 완벽하게 조화롭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걸 소유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그 마음으로 오늘까지 버텼다. 하지만 다혜는 나처럼 소유하는 것 말고

그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혜와 함께 자주 가던 중식당에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다혜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C’etait ma rève de devenir une créateuse de chaussures”

“뭐야? 엄마 프랑스 말해?”

“엄마 꿈은 구두 디자이너였어.라는 뜻이야”

“와 대박.”

“엄마는 구두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는데... 엄청 가난했어.

근데, 대학교 3학년 때 엄마 아빠 두 분 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보험금이 꽤 많이 나왔어. 그 돈으로 엄마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옷이랑 구두 디자인 공부를 했지.

근데 거기서 아빠를 만난 거야. 아빠가 파리 특파원으로 왔었거든.

그때 아빠 진짜 멋졌어. 알지? 그렇게 너를 임신했어.

아빠랑 결혼을 못하면 그냥 너랑 나랑 프랑스에서 굶어 죽겠더라.

사실 그때 아빠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엄마가 결혼 안 하면 죽을 거라고 매달렸어. 그렇게 결혼한 거야.


다혜야,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


다혜는 무슨 그런 결혼이 있냐며 말이 안 된다고 한다.

자기를 임신한 것 때문에 유학을 망친 거냐고 한다.


하지만, 다혜는 모른다. 내 진짜 마음을.


그 당시 나는 내 인생의 주어진 돈과 젊음을 전부 걸고 프랑스로 왔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가 디자인한 구두는 세상에 나올 수 없을 거 같았다. 내가 사랑한 구두를 창조한 크리스찬 루부탱은 13살부터 구두를 좋아했고, 평생 구두 주변을 맴돌며 살았다. 그는 항상 과감한 도전으로 놀랍도록 아름다운 구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를 밀어주는 어머 어마한 재력가 친구까지 있었다.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냥 보통의 재능을 가진 가난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학사 레벨로 3년을 공부하고 나니 비로소 현실이 보였다. 더 공부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돈이 거의 다 떨어지고 방황하던 그 시절, 우연히 남편을 만나 사고처럼 하룻밤을 보냈다.

그는 남자로서 인지, 기자로서 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당시 내 처지를 불쌍히 여겨주었다.

분명 잘 될 거라고 멋진 구두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주었다.

그 당시 나는 돌아갈 곳도,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죽음을 생각하고 며칠 동안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리고 진짜 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 내 몸이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그때, 벼랑 끝에서 누군가 내 손을 잡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그 당시 나에게 필요한 건 기댈 수 있는 안정된 그 무엇이었다.

쉬고 싶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나와 아기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런 남자다. 타지에서 만난 낯선 누군가의 아픔에 울어주는 가슴이 뜨거운 남자.

불안하지만 하이힐처럼 폼이 나는 남자.


“다혜야, 엄마 아빠랑 이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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