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순이는 아무나 하나
제목까지 말하긴 그렇고, 어쨌든 다섯 명 정도의 영향력 있고 아름다운 여성 패널과 가정의학과 교수가 함께 앉아 여성 건강에 대한 정보들을 전달하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됐다.
그날의 주제는 비만, 뱃살과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뭐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니고 암튼 여성 호르몬에 대한 내용이 나왔던 거 같다. 예쁘고, 스타일 멋지고, 날씬하고! 그런 여성이 화면에 나오니 왠지 보게 된다!
이래서 멋진 여성 아이돌의 주 팬층이 남성일 거 같지만 오히려 여성이라고 하는 건가?
암튼 저 이쁜 사람들은 뭘 입고 있나, 뭘 먹고사나 궁금해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한 발 더 나아가 그녀들의 허리둘레와 종아리, 허벅지 둘레를 알려준다.
출연한 의사가 자신의 허리둘레, 허벅지 둘레, 종아리 둘레를 어떤 공식에 대입해 보면
건강한지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한 것.
그리고 직접 스튜디오에서 패널들의 허리둘레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71cm. 72cm. 62? cm 뭐 암튼 제일 큰 숫자는 76cm. 76이 나온 그 패널은
이번 녹화를 위해 2kg을 감량해 그나마 76이 나왔다고 다행이라며 나만 빼고 다들 왜 이렇게 날씬하냐고
투덜투덜 대며 입담을 뽐내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배우는 심지어 71인가 72인가.. 암튼 그녀의 허리둘레를 측정한
가정의학과 의사는 "정말 대단하시네요!" 연신 감탄을 쏟아낸다.
76이라... 그래? 그럼 내 허리둘레는 얼마였지?
코로나 시기에 어느 정도 살이 찌는 게 당연한 일이고, 내가 엉덩이 둘레가 커서 그렇지 그래도 허리둘레는
웬만할 거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기 시작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줄자가 어딨지? 제대로 측정이라는 걸 한번 해보자!
아무리 찾아도 없다. 여기저기 서랍을 뒤져도 없자 짜증이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측정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식지 않았다. 잠시 후, 둘째 아이가 강낭콩 줄기 길이를 재느라 갖고 있었다며 나에게 줄자를 하나 건네주었다. 드디어 측정을 했다.
왓!!!!
줄자는 나에게 예상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제공했다. 그랬구나. 내 허리둘레는 그랬구나...
솔직히 코로나 이후 제대로운동 이라는 걸... 한 기억이 없긴 하다. 주 1회 산행을 시작한 지도 한 달 정도밖에 안됐고, 사실 그것도 몇 번은 못 갔다. 그렇다고 내가 뭐 맨날 먹고 누워만 있는 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안 곳곳에 어질러진 것들을 정리하느라 분주하고 냉장고와 가스레인지를 오가며 밥 차리고, 식탁에 놓인 그릇들 정리해 설거지하고, 손빨래할 것들은 쭈그리고 앉아 비벼 빨고, 청소기 돌리고, 현관에 널린 신발 정리하다가 맘먹고 식구들 신발들도 솔로 문지르고, 너무 더러운 건 빨아서 속에 신문지를 꽉 채워가며 며칠 말려도 주고. 오늘은 완강기실에 둔 선풍기 두 개를 꺼내 닦아서 설치도 하고
화분에 물도 주고, 마른 잎은 따주고 등등등 매일매일 집 안에서 발에 땀나게 움직이며
엄마로서, 주부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애쓴다. 진짜 많이 움직이는데... 왜 그러지?
물론 끼니가 돌아오면 최선을 다해 먹긴 했다. 하지만 그때 제대로 먹지 않으면
너무 기력이 떨어져 아프기도 하고, 힘드니까 그랬던 거다.
솔직히 야식으로 치킨, 떡볶이, 라면을 먹은 적도 없고
이젠 일도 하지 않으니 술 마실 일도 없고, (일로만 마신다가 나의 술 원칙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비만을 면하기 힘들다는 것인가??
어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끝나고 습관적으로 채널을 돌리는데 백종원 씨가 고풍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돈가스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다음으로 소시지를 물에 데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탱글탱글 어찌나 윤기가 자르르 한지 그거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거다.
이번엔 또 라면을 흡입한다. 후루룩 후루룩...
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내 안에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고기를 한점도 넣지 않고 양파, 감자, 파프리카, 브로콜리로 만든 비건 카레로 이른 저녁을 먹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한 시간이다. 그래도 난 탄산수 한 병을 마시며 쩝쩝 입맛을 다셔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숫자는 76과도 거리가 멀다.
만약 저런 걸 마구 먹는다면... 내 허리둘레는 어떻게 되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먹고살아야 76, 71, 72... 그런 숫자를 소유할 수 있냐 말이다!
뭐야... TV에서는 채널 하나 건너 하나, 맛있는 음식 먹는 장면들 연속이다.
먹는 출연자들은 그 음식을 먹는 그 순간이 무슨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도 된 듯 경이로운 표정이다.
잘 먹는 그 모습이 마치 사람됨과 털털한 인간성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하다.
유명 맛집 가본 게 대단한 스펙이고, 이걸 또 그렇게 흠모를 한다.
그러면서도 날씬함에 대한 존경심 또한 각별하다.
그러니까 잘 먹으면서 날씬해야 하는 거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먹을 때마다 그렇게 경이로운 표정으로 복스럽게 먹는다면
어느 정도 살집이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먹는 시간 말고 다른 시간은 뛰기만 하는 건가?
"전 빵 좋아해요 내 별명은 빵순이예요!" 이런 말을 하는 예쁘고 날씬한 여성들을
TV에서 많이 본다. 마치 전 아직도 순수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는 거 같다. 왠지 빵 좋아하는 사람이 설마 나쁜 사람이겠어요? 하는 것 같다.
빵 좋아하면 많이 먹을 테고, 그런데도 저렇게 날씬해? 그것 또한 일종의 아이러니인가?
나와 함께 각종 빵으로 아침을 시작했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빵을 거부하며
두유와 귀리가루, 사과와 요구르트를 먹고 있다. 이 변화로 자신이 대사증후군 고위험군에서 벗어났다며 나만 보면 간증을 쏟아내고 있다. 아침에 먹는 빵이 내 비만의 주범이란다. 당장 그 코스트코에서 사 온 버터와 쨈
그런 걸 끊어야 한다며 매일 아침 나를 압박한다.
" 아... 나 진짜 열 받네. 아침에 식빵 한 장 버터에 구워 먹는 게 무슨 죄야?
그거 먹고 12시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알기나 해? 왔다 갔다... 뭐 내가 효율 없이
움직이는 건 인정을 해! 그래도 어쨌든 정신없이 동동대다가 시계 보면 12시야,
그럼 또 점심... 애들 밥 챙기고 그 사이 나도 허기져서 한 그릇 먹고,
먹다 보니까.. 뭐 주걱으로 한 두... 숟가락 정도 추가해 먹으면 이게 과식인가 싶어 죄책감 들고...
TV만 틀면 온갖 산해진미에 맛있게 먹는 장면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알잖아.
보는 사람 침샘 폭발하라고 슬로 편집에 음향효과에,
아주 그냥 오장육부가 환장하게 난리를 치는 통에 시시때때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막 차오른다고... 그래도 그런 음식 먹겠다고 맛집을 찾아가길 하나 배달을 시키길 하나
점심, 저녁 그저 내가 만든 반찬으로 밥 먹고... 그래! 뭐 가끔 두.. 공기도 먹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침에 고작 식빵 한 조각 버터에 구워 마스카포네 치즈와 무화과잼 좀 발라 먹는 걸
갖고 그렇게 돼지 취급을 해야 돼? 나 빵 좋아해! 나 별명 빵순이였다고!
나 그 빵 먹고, 비만으로 살래. 아주 슬기롭게!"
종로에서 뺨을 맞고, 딴 데가서 눈 흘긴 거 같긴 하지만 어쨌든 속은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