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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Aug 29. 2021

부부의 세계에는 없고
결혼 이야기에는 있다.

2020년 7/8월호 CTK에 실린 칼럼입니다.

*이번 주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브런치에 발행할 글을 쓰지 못해

(아무도 원고를 달라 독촉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맨날 시끄럽게 쥐뿔 없는 아줌마가 또 뭐 쓴 거 있나? 하는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실까 해서   

작년 여름 연재하던 잡지에 실린 칼럼을 한편 올립니다.     



 원래 욕하면서도 보는 게 드라마라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다. 이미 종영한 화제의 드라마 '부부의 세계' 말이다. 시청률까지 대박이 났다고 한다. 나 역시 한 회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시청했으니 할 말은 없다. 솔직히 재밌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요즘은 드라마를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월요일이 되면 육아 동지들 카톡방에서 후일담을 나누는데, 그게 또 얼마나 재밌는지 모른다. 드라마 후반부에 남편 이태오가 두 번째 결혼까지 실패하고 폐인이 된 후, 전처와 살고 있는 자신의 친아들을 납치한 듯 보이는 마지막 장면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아들을 데려다가 2인 가족 국가재난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였다는 한 멤버의 스포일러에 모두 신나게 웃었다. 이 드라마의 영향력이 왠지 모르게 크게 느껴진다.  


 '부부의 세계'는 영국 B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닥터 포스터’를 원작으로 JTBC에서 제작됐다. 완벽해 보이는 결혼이 남편의 불륜으로 부서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아내는 결혼을 하고 남편의 어린 시절 친구들과 지인이 살고 있는 지역 공동체에 들어가 아내로 엄마로, 직업인 의사로서도 인정을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남편은 젊고 아름다운 그 지역 유지의 딸과 불륜이고, 상간녀는 임신 중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며 말한다. 

"아내도, 그 여자도 둘 다 사랑해!" 

어이가 없다. 아들은 사춘기 한복판인데, 엄마 아빠가 온 동네가 다 알게 요란한 이혼을 하게 생겼으니 큰일이다. 앞으로 저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렇게 나는 드라마 '부부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흡입력이 마치 늪과 같다.    

       

 이 드라마는 이혼이 그냥 법적인 절차를 밟는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자식을 어쩔 건가? 남편으로서는 아웃이지만, 아빠로서는 괜찮은데 그냥 아들을 위해 꾹 참아볼까 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용서해주고 싶다. 눈 한번 딱 감으면 대충 그럴듯하게 지어진 부부의 세계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인 거다. 게다가 남 잘되는 꼴에 늘 배 아파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혼 소식을 던져준다는 건,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가. 아내의 복잡한 심리가 내 마음처럼 느껴진다. 공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배신감에 이성을 잃은 아내는 이번엔 상간녀의 집으로 찾아가 그 부모 앞에서 행패를 부리고 그 집 살림살이를 부순다. 이건 아마도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고 저렇게 분을 풀 수 있는 아내가 몇이나 될까. 드라마에서라도 저런 장면을 보니 사이다 한잔을 들이킨 듯 시원하다. 드라마가 이래야지. 판타지도 있어야지! 무릎을 치며 TV 앞에 딱 붙어 앉아 몰입했다. 이런 이유로 시청률 고공행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후반부에 이르자 이상하다. 공감이 안 된다. 어쩌면 남편이 저렇게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이혼했다면 다행인 거다. 서로 그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한 거 같은데도 좀처럼 끝나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가 이상하다. 물론 16부작이니까 쉽게 정리될 순 없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편과 결혼한 불륜녀의 인생까지 걱정하며 결국 남편을 또 이혼시킨다? 이걸 페미니즘에 입각한 여성의 연대로 봐야 할지, 아니면 절대 종식되지 않는 코로나19 바이러스처럼 징글징글한 부부의 세계를 말하고 싶은 건 지 도무지 모르겠다. 최종회까지 보고 나니 허탈하다. 이렇게 화제의 드라마로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면 뭔가 의미 있는 질문 하나 정도 남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각본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 있다. 마블 시리즈의 블랙 위도우,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한 '결혼 이야기'다. (알다시피 각본상은 ‘기생충’이 받았다!) 나는 이 작품을 작년 겨울에 즈음 우연히 보게 됐다.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급하게 할 일도 없어 그냥 멍하니 앉았는데, 마침 식탁에 놓인 태블릿 PC에 깔린 넷플릭스가 보였고, 거기 '결혼 이야기'가 있었다. 우주 이야기나 사랑 이야기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넷플릭스의 결혼 이야기는 뭘까? 큰 기대는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내 예상을 뛰어넘는 큰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눈물이 쏟아져 엉엉 울고 말았다. 그 눈물은 뜻밖에도 남편을 향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도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는 이타적인 여자와 이기적인 남자가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건지 신랄하게 보여준다. 남편은 연출가고 아내는 배우다. 둘은 함께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온다. 아내는 말한다. 늘 그랬듯 내 연기를 비판해! 당신 그거 못하면 안 되잖아. 남편은 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아는 것 같은데도 왠지 모르게 비판을 한다. 하다 보니 최선을 다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비판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이다! 아내는 상처를 받고 방으로 들어가 눈물을 흘린다. 연출가로서는 능력이 있을지 몰라도 남편으로서는 빵점이다.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남편의 지지와 응원을 받고 싶었을 아내다. 연기에 실수가 있었다면 더욱 따듯한 위로가 필요했을 거다. 하지만 남편은 뭐가 문제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아들에게도 좋은 아빠이고 싶다. 아들과 멋진 핼러윈을 보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자신의 극단 의상팀에 부탁해 커플로 입을 특별한 옷을 제작한다. 하지만 아이는 갑자기 그 옷이 싫어졌다. 그냥 사촌들도 입은 닌자 옷이 입고 싶을 뿐이다. 아빠는 이해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하는데, 계속 거부당하고 비난을 받는다. 엉망이 된다. 그렇게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두 사람. 아내는 공격한다.

 "당신은 이기적인데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 당신이 이기적인지도 모르고 있어!"

남편은 이런 대화가 어렵다. 아내의 입에서 빠르게 쏟아져 나오는 저 길고 복잡한 문장들, 극도로 흥분된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뭘 어쩌라는 건가? 답답하다. 그냥 내가 이상한 만큼 너도 이상할 뿐이다. 분노가 밀려온다. 폭발한다. 급기야 매일 눈 뜰 때마다 당신이 죽기를, 차에 치여 죽어버리기를 기도한다는 저주의 말을 쏟아내며 오열한다. 그 순간 아내는 남편에게 연민을 느낀 걸까? 그의 분노가 잦아들도록 등을 쓸어주며 위로한다.  나도 눈물이 쏟아졌다. 이기적인 남자를 이토록 완벽하게 설명해 낸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이 영화의 감독은 말하고 싶었나 보다. 

"남자들도 진짜 답답합니다." 

영화에 대해 알아보니 감독이 남자다. 게다가 그 역시 '결혼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배우인 아내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이력이 있다. 자전적 이야기여서 그렇게 생생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었던 걸까?      


 결국 남편과 아내는 이혼에 이르는 길고 긴 여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다. 흙탕물이 잔잔해지자 사랑이 시작된 순간이 떠오른다. 그러자 이혼이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인지, 그 과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절절히 다가온다. 조금만 더 서로를 이해했더라면, 배려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게 무엇이든 이혼보다 쉬운 일이었을 텐데… 

"이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이혼을 생각한다면 한 번 더 고민해보세요. 지금 자존심을 내세우며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지금 멈춰야 호미로 막을 수 있답니다. 이혼은 가래로도 못 막을 대형사고라고요! 사랑이 시작된 순간을 떠올려보세요. 빛나던 순간, 아름다운 기억들!" 


'결혼 이야기'는 사실 이혼 이야기였다. 어떤 결혼이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바닥까지 다 보고 나니 너무 무섭다. 지금 내 옆에 있는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이혼을 선택했다면, 그땐 상대방을 저주하기보다 행복을 빌어주면 좋겠다고, 그것이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결혼 이야기'는 말한다.         

  

 생각해보면, 나도 이 영화의 주인공 아내 못지않게 남편에게 상처 주는 말을 많이 한다. 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냐며 남편을 비난한다. 그런데, 왜 그게 그토록 안됐던 건지 깨달았다. 그럴 수 있구나!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있는 거다. 게다가 내 남편은 울부짖지도 못한다. 그럴 수 없게 설계된 인간이다. (현실의 남자는 거의 그렇다!) 그러니 속이 얼마나 썩었을까. '결혼 이야기'를 통해 남편을 이해하게 됐다. 이후 나는 뭔가 해답이 없는 복잡한 감정에 대한 대화는 가급적 남편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남편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는 내지 않는다. 그는 내 숨은 의도 같은 건 절대 파악할 수 없다. 알아서 뭔가 해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말자. 결혼 20년 만에 그런 생각을 했으니 나도 참 어리석다. 이제와 고백하는데, 사실 '결혼 이야기'가 '기생충'과 함께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오른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결혼 이야기'를 응원했다. 나에게 진정한 부부의 세계를 알려준 작품이니까! 


 로맨스 드라마에는 공통점이 있다. 남자 주인공은 완벽하다. 재치가 넘치고, 능력이 있다. 어떤 어려움도 다 극복하는 열정, 책임감과 성실함은 기본이며 조각 같은 외모에 모성애를 자극하는 가슴 시린 가족사나 어린 시절의 슬픈 기억까지 장착해 그의 내면은 심연처럼 깊고 따듯하다. 여자 주인공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밝음을 잃지 않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며 어떤 상황도 긍정적으로, 아름답게 바라보는 순수한 영혼을 갖고 있다! 그런 둘은 약속을 하지 않아도 운명처럼 자주 만난다. 남자 주인공은 여 주인공이 가장 슬픈 순간 홀연히 나타나 따듯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안아준다! 


"내가 꼭 기억할게~ 내가 널 바라볼게~"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교회에서 본 내 모습은 늘 밝게 웃고 긍정적이며 씩씩해서 좋았다고. 항상 그럴 줄 알았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사사건건 따지고, 무슨 일이든 한 번도 그냥 넘어가 주는 법이 없어 너무 피곤하다는 것. 남편은 나를 로맨스 드라마의 여주인공과 동일시했던 모양이다. 듣고 보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남편은 왠지 차가우면서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 보였다. 부서의 회장으로도 자주 선출됐다. 그러니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인정받는 나름 우수한 인재로 보인 거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건 밖의 모습이고, 집 안에서는 그냥 소파를 사랑하는, 가부장적 마인드가 내면 곳곳에 조용히 뿌리내린 전형적인 남자였다. 누굴 탓하랴… 나 역시 드라마 남자 주인공과 남편을 동일시하며 연애를 한 거다. 사랑에 빠지면 눈에 뭐가 씐다는 게 이런 의미인가? 놀랍게도 우리의 연애 기간은 무려 7년. 7년을 사귀어도 몰랐던 걸, 결혼 한 달 만에 깨달았으니 우리가 정말 사랑하긴 했다보다! 남편이 나에게 노란색 튤립을 주며 같이 야구장에 가자고 한 게, 우리 연애의 시작이었다. 그날 기분이 너무 좋아서 잠도 못 잤는데… 그래, 또 식탁에서 내 음식을 비판하는 만행을 저지르거나, 갑자기 당 떨어져 인상 팍 쓰고 사람 눈치 보게 만들면, 그 노란 튤립 생각하며 넘어가 줘야겠다. 어금니 꽉 물고 말이다.   


"찌개에서 쿰쿰한 냄새가 난다?"

"어머 정말? 왜 그랬지? 다음엔 깔끔하게 끓여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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