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날라 온 박스 하나

by 그린숲

미국에 살면서 가장 확실해진 사실, ‘라면’은 나에게 있어 소울푸드다. 다만, 반드시 한국라면이어야 한다. 말 그대로 영혼을 달래주는 음식.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요리 생각만 해도 벌써 마음이 치지는 날에는 고민할 것도 없이 라면을 꺼내어 맛있게 끓인다. 라면, 이 두 글자에 생기가 돌고, 라면 한 그릇에 지쳤던 몸과 마음에 활기가 차오른다면, 이 음식을 소울푸드라고 하는 것 외에 달리 뭐라고 해야 할까.



날이 덥건 춥건, 라면 한 그릇이 주는 만족감과 안도감은 같은 모양이다. 추운 날, 뜨끈한 라면의 행복감은 말 할 것도 없다. 더운 날, 선풍기 앞에서 뜨거운 라면을 식혀가며 먹는 여름날의 라면 맛. 후아, 잘 먹었다. 땀을 뻘뻘 흘린 다음에 오는 뱃속의 풍족이 노곤한 행복감을 몰고 온다.


미국에 있는 미국라면, 일본라면, 베트남라면, 중국라면 등 온 세상의 라면은, 아쉽게도 나의 ‘라면 세계관’이 받아 들여 주지 않는다.


먹고 나면 몰려오는 나트륨과 칼로리에 대한 죄책감. 정크푸드가 아닌, 맛이 주는 행복감에 무게추가 크게 기울어버린 한국라면과는 달리, 항상 괜히 먹었다 싶다.


음식에는 늘 관대하여 새로운 음식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편이지만, 라면의 영역만큼은 늘 먹던 맛, 익숙한 맛을 양보하지 않는다. 음식의 세계를 돌고 돌아, 환희하고, 새로운 맛을 개척하고, 그러나 때로는 실망하고, 상처받고. 그리고 언제든지 편안하게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라면의 포근함.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는 내 여행 가방에서 ‘스낵면’을 발견한 아빠.


“더 맛있는 라면도 많은데 왜 하필 스낵면이냐?”


“미국에서는 왠지 스낵면이 제일 생각이 많이 나요.”


아빠의 의문이 스낵면 비하발언(?)은 아닐 것이다. 스낵면보다 고급스럽고, 맛이 풍부한 라면들은 분명히 있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딸래미의 돌아가는 여행 가방 안에 ‘초라한 스낵면’ 한 묶음이 마음 쓰였을 아빠다.


돈 없던 대학생 시절, 싼 맛에 부담 없이 사다가 룸메이트와 함께 두 세 봉다리 부담 없이 끓여 먹었던 추억. 밥을 말아 먹으면 제일 맛있다고 했던, 이름 모를 한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의 쇼킹한 인증에 단박에 동화된 마음. 그래서 스낵면은 내 마음속 1등 라면이 되어버렸다.




간혹 한국에서 박스가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날라 온다.


생일이 되면 꼭 내가 사는 아파트로 도착하는 박스 하나. 친구들이 보낸 생일 선물과 편지, 라면이 담긴 박스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박스 하나를 보내기 위해 들여야 하는 그녀들의 정신적인 노고와 물질적인 지출을 알고 있기에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애잔한 박스 하나.



친구들이 보낸 라면 박스.


이제 막 아이 하나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사회생활 복귀를 준비하던 중 둘째를 임신한 친구 하나. 육아휴직을 끝내고 아이 둘을 매일 아침 어린이집에 보낸 다음 그대로 출근을 하고, 또 아이 둘과 퇴근길을 함께하는 또 다른 친구 하나.


서로가 서로에게 1순위이었던 시간을 지나, 이제 친구들은 어느덧 한 가족의 중심이 되어 ‘엄마’의 삶을 살고 있다. 이미 충분히 바쁘고 고단한 매일, 그 박스를 나에게 보내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짜내었을 친구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돈다.


그리고 그 박스 안에 선물들과 함께 담긴 라면, 라면들. 한국에서 팔리는 제 가격보다 열배 스무 배는 비싸져서 나에게 도착한 라면들.


미국에서 다 살 수 있는 라면이냐고? 어떻게 이 라면들을 미국에서 살 수 있겠니.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라면인데. 그래도 이제 그만 보내라, 응?


동생이 보낸 라면.


동생 녀석에게 부탁한 물건이 담긴 박스 안에도 라면들이 꾸역꾸역 들어있다. 참신한 편의점 라면 먹고 싶다는 내 말을 흘려듣지도 않고, 처음 본 신상 라면을 종류별로 사서 넣어 주었다. 부탁한 물건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라면들만 박스 안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다.


언니야! 메인은 라면이 아닌데! 라면에 감격하자 슬쩍 끼워 넣어 많이 보내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담긴 동생의 외마디. 이 정도면 차고 넘친다, 동생아.


부엌, 오른쪽 가장 위, 손이 닿을랑 말랑하는 찬장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낸 나의 소울푸드, 라면들이 그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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