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친숙하면서도 흔한 식재료인 무와 호박. 가격도 저렴해 마트에 식재료를 사러 가면, 계획에 없어도 은근슬쩍 담아가게 된다. 일단 담아가면 어디에든 묵묵하게 제 역할을 할 재료들이다.
미국에서도 사먹기보다 요리를 하는 먹생활, 래디시(radish)와 주키니(zucchine)는 쉽게 구할 수 없는 무와 애호박 대신, 냉장고 한 편을 늘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 식료품 마트에서 볼 수 있고, 무엇보다 저렴한 채소들이다.
미국에서 래디시는 주로 음식을 꾸며주는 가니쉬나 샐러드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무보다는 쌉쌀한 맛이 덜하고, 수분감이 있는 처량함에 생으로 먹기 좋은 채소.
래디시를 얇게 썰면, 선명한 빨간 테두리가 매력적인데, 음식을 더욱 먹음직스럽게 꾸며준다. 별 것 아닌 샐러드도 슬라이스 래디시 하나면 ‘있어 보이는’ 요리로.
주키니는 애호박보다 길고 통통하다. 색도 애호박보다 짙은 초록을 띤다. 맛은 호박과 큰 차이는 없지만, 개인적인 입맛으로는 애호박보다는 호박의 향이 덜한 것 같다.
미국에서는 주키니 속을 파낸 다음 다른 재료와 치즈로 채워 오븐요리로 내거나, 얇고 길게 썰어서 롤 음식으로 쓴다. 튀김옷을 입힌 다음 기름에 튀긴 ‘주키니 프라이’도 팔고 있는 식당도 있는데, 맛은 우리나라 호박전과 비슷하다.
이 곳 저 곳, 다양하게 쓰이는 식재료인 래디시와 주키니지만, 무와 호박에 익숙한 토종 한국인 입맛은 생소한 재료들을 한국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래디시를 단 한 번도 샐러드 재료로 쓴 적은 없지만, 무조림과 국물내기 용으로는 셀 수 없이 활용했다.
래디시는 크기가 작아서 깨끗하게 씻은 다음 통으로 넣어도 되지만, 한 입에 넣기에는 익은 다음 속에 품고 있는 열이 너무 뜨겁기 때문에 반으로 썰어 넣는다.
다양한 채소들과 래디시를 오래 끓여내면, 래디시를 넣었을 때와 안 넣을 때의 그 국물맛은 천지 차이다.
특히 어묵탕이나 우동을 요리할 때는 래디시가 필수다. 국물 맛이 세지 않기 때문에 푹 익은 래디시의 향과 맛을 음미하기 좋은 요리다. 잘 익은 래디시 하나를 꺼내어 짭조름한 간장소스에 폭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래디시는 색이 빨개서 국으로 끓이면 국물 색이 분홍빛으로 변한다. 맵지도 않은데 국물 색이 빨간 것이 어색해, 괜히 고춧가루를 넣은 듯 만 듯 톡톡 넣는다. 완성된 요리의 국물색은 여전히 오묘한 분홍빛이지만, 고춧가루 색 이겠거니.
완전히 빨간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를 듬뿍 쓴다면 요리에 우려져 나오는 래디시의 색은 걱정할 필요 없다. 바닥에 반으로 썬 래디시를 깔고 도톰한 두부를 올리거나 생선을 올려, 매콤달콤한 고추장 양념에 졸이면 한국식 무조림이 된다. 무의 깊은 맛은 다소 아쉽지만, 부드러운 식감과 특유의 무향은 래디시를 통해서도 구현할 수 있다.
주키니는 애호박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요리 활용도도 높다. 주키니로 가장 자주 해 먹는 요리는 단연 호박전이다. 동그랗게 썰어서 동글동글 호박전, 얇게 채 썰어서 다양한 채소들과 함께 부쳐 먹는 부침개.
비오는 날에는 왜 그렇게도 속절없이 지글지글 부침개가 먹고 싶은지. 결국에는 냉장고에서 있는 주키니를 날름 꺼내어, 홀린 듯 다급한 칼질을 시작한다. 주키니의 향은 국으로 끓였을 때보다 기름과 만났을 때 제대로 느껴진다.
래디시와 마찬가지로 주키니도 매운탕에 자주 사용한다. 매운탕에 주키니를 썰어 넣으면, 재료가 모자라 횅한 요리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기분. 주키니만 썰어서 담백한 호박된장국을 끓여도 좋다.
주키니의 의외의 발견은 카레에 있다. 소고기 카레를 만들었던 날, 요리의 색이 아쉬워서 썰어 넣어 볼까 했던 것이 주키니. 주키니를 작은 크기로 깍뚝 썰어 넣었더니, 당근과 감자와 함께 카레에 풍부한 색과 먹음직스러움을 더한다.
카레와의 궁합도 좋다. 주키니의 맛 자체가 강하지 않다보니, 강한 카레의 맛에 그대로 녹아들어 간다. 카레에 은은하게 녹아 든 주키니의 달콤한 향도 일품. 주키니의 새로운 매력을 알게 된 날, 이제 카레를 만들 때마다 주키니가 있으면 꼭 썰어 넣곤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데, 당최 로마법은 입맛에 안 맞는 토종 한국인의 먹생활이 미국에서 무르익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