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이 반한 한국의 ‘빨간 맛'

by 그린숲

미국에서 식생활을 하면서 놀랐던 점은 미국사람들이 의외로 매운 맛을 즐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국사람’을 정의해 볼 필요가 있는데, 알면 알수록 사람들의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카페나 식당에서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미국을 괜히 ‘이민자의 나라’라고 부르는 게 아니구나, 새삼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 멕시코는 매운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만큼, 미국서 사는 멕시코인들은 매운 음식을 즐긴다. 할라피뇨가 들어간 디저트류는 스타벅스에서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돈데, 주문해서 먹어 봤더니 매운 맛 킬러인 나조차도 ‘어라?’ 할 정도로 매콤하다. 타코와 함께 나오는 살사소스는 청량고추 저리가라할 정도로 매워서 눈물이 찔끔. 미국서 생활하는 아시아인들이 매운맛을 즐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식당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고추피클과 마트에 진열된 다양한 매운 스파이시들도 인상적이다. 미국에서 매운 맛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남자’라는 귀여운 경쟁심리도 목격했는데, 속으로는 에헴- 그게 뭘 맵다고.


이렇게 몸소 체험하면서도 여전히 콕 박혀 있었던 미국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즐기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이 산산조각 난 사건이 있다. 한국음식을 직접 요리해 미국인 친구들을 대접할 기회가 생겼던 어느 날, 그날의 메뉴는 참치김밥, 잡채, 닭볶음탕으로 정했다.


친구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메뉴는 아무래도 잡채가 될 것이다. 미국서 스시가 대중화되어 있는 만큼 친근한 아시아 음식으로 김밥을, 대망의 도전 메뉴로 닭볶음탕을 준비했다. 한국의 매운맛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추장을 썼는데, 그래도 평소 보다 매운맛 레벨을 3분의 1정도 낮추었다.


다진 소고기와 고명까지 예쁘게 올라간 알록달록 잡채에 손길이 많이 가겠지, 했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날의 넘버원 인기메뉴는 바로 닭볶음탕이었다. 한 입 먹자마자 동그랗게 커지는 눈들은 거짓이 없다. 조금 매운지 스읍-스읍- 거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닭볶음탕을 향한 서툰 젓가락질에 이번에는 내 눈이 커지고 말았다.


“안 매워?”


“맵긴 매운데 정말 맛있어, 더 매워도 맛있게 먹을 것 같아.”


도전메뉴가 인기메뉴로 등극한 순간이다. 냄비 바닥에 남은 고기 몇 조각에 서로 먹겠다고 눈치싸움을 해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만들걸.


사실 미국에서도 간장을 쓰는 요리들은 쉽게 볼 수 있고 익숙한 맛이다. 아시아 식당의 요리 대부분에 들어가는 소스 베이스에는 간장이 깔려있고, 메뉴마다 약간의 변주가 있을 뿐이다. 달큰하고 짭조름한 맛, 분명 매력적이지만 새로운 맛은 아니다.


반면 고추장은 이 곳에서 아직은 미지의 맛이고, 의외로 잘 알려진 ‘한국 대표 소스’다. 아시아 음식에 관심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고추장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 닭볶음탕을 처음 맛본 미국친구도 ‘이거 고추장이지?’라고 했을 정도.


즐겁게 감상했던 미국의 한 요리영화가 떠오른다. 푸드트럭을 운영하는 한 미국인 쉐프는 다양한 소스를 사용하며 맛연구를 하는데, 테이블에는 창의적인 음식을 만들기 위한 소스로 고추장이 놓여있다. 한 스푼을 푹, 고추장을 쓰는데 망설임이 없다. 고추장의 맛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이 곳의 대중적인 매운맛이 전반적으로 시큼함이 가미된 가벼운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맛있다고 할 수 없었던 매운맛. 매운맛을 즐기는 미국인들 중에서는 이 특유의 시큼함 때문에 매운맛을 꺼리며,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색다른 매운맛을 찾는다. 자, 이쯤에서 등장하는 성급하지만 가능성 있는 일반화, 그래서 미국에는 감칠맛을 장착하고 묵직한 한 방이 있는 한국의 매운맛이 필요하다.


내심 한국음식을 알리기에는 달큰하고 익숙한 맛인 불고기가 안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이 열광하는 맛은 달콤함 보다는 분명 빨간 맛.


맛있는 음식은 뭐가 되었든 국적을 불문하고 맛있다. 한국음식 알리기, 레퍼토리가 되어버린 불고기보다는 멈출 수 없는 마성의 닭볶음탕이라고, 미국의 중심에서 ‘한국의 빨간맛’을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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