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린숲 Nov 17. 2018

미국 프렌즈기빙, 뜻밖의 초대 혼신의 예스!

미국의 추수감사절이 다가오고 있다. 생활용품점이나 마트에 호박을 아이템으로 한 제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추수감사절 시즌이구나, 풍성한 상상들이 시작된다.


알록달록 호박들이 굴러다니는 수확의 계절, 뜻밖의 초대를 받았다. ‘프렌즈기빙’에 올 수 있느냐는 지인의 문자. 추수감사절을 말하는 ‘땡스기빙’은 알고 있었지만 프렌즈기빙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 터라, 잠깐 고민도 했다. 그러나 이내 유추되는 즐거운 파티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


대부분 집에서 일하고, 집에서 밥을 먹고, 집에서 쉬는 집순이의 일상은, 미국 타향살이와 맞물려 한껏 움츠러든 채다. 틈만 생기면, 나가자, 나가자, 몸과 정신을 용감무쌍하게 일깨우는 담금질에도, 한정된 인간적 교류는 어쩔 수 없다. 그것을 담당하는 내 안의 검은 단단하지 못한 채 모양만 겨우 섬경하게 유지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미국에서의 새로운 만남, 교류에 대한 상상만으로 굳어진 이미지들과 두려움은 나를 더욱 잦아들게 만든 모양이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담금질 할 검이 있다는 것이다. 순간의 열기에 나를 맡길 수만 있다면, 더욱 단단해 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검이다.


그래서 최근의 선택들은 내 본성과 맥락을 완전히 달리한다. 친구의 대학교 교수 퇴직 파티에 같이 가자는 제안에 예스, 한 번가고 반해 버렸던 펍에서의 소소한 모임도 예스, 프렌즈기빙 파티도 예스. 일단은 뱉고 보는 예스, 예스의 행렬이다. 




예스를 말한 그 순간부터는 하루에도 몇 번 씩 두려운 상상 속에 마음이 요동친다. 오고가는 생소한 언어의 파도 속에서 길을 잃은 기분, 차가운 눈을 하고서 멀어지는 배를 보며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라는 절박한 상상은, 마음을 점점 피폐하게 만든다. 그 상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미국에서의 경험으로 나도 모르게 쌓아온 탑이라는 답을 내리면 더욱 슬퍼지는 마음이다. 모두 다 옹졸한 마음이 만들어 낸 상상이라면 오히려 더 안심이련만.


이 모든 과정들은 담금질이다, 생각하면 또 어느새 마음이 담대해 진다. 마음이 담대한 순간에는 부지런하게 프렌즈기빙에 준비할 음식 리스트를 뽑아본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땡스기빙 전에, 친구들끼리 가볍게 만나 음식을 나누며 즐기는 프렌즈기빙은 초대받은 친구집에 갈 때, 소소한 음식을 가져가는 게 일반적이다. 땡스기빙 코드에 맞추면서도 겹치지 않을 음식을 준비해 간다면 센스 만점이겠지만, 생각보다 이 코드에 맞추기가 까다롭다. 친구들이 가져올 음식을 유추하면서, 맛을 해치지 않고 어울릴만한 음식을 선택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호박 요리를 준비해 보는 게 어때? 인스타그램에 올린, 내 호박요리를 본 미국 친구의 제안을 받았다. 땡스기빙의 데코에 호박이 빠지지 않고, 호박파이도 있고, 호박이 프린트 된 테이블보도 있지만, 실제로 ‘호박’을 먹는 일은 좀체 없다는 것이다. 아하! 그렇단 말이지! 단호박갈비찜과 단호박전, 단호박조림 중에 고민을 하다가, 단호박조림을 선택했다. 엄청나게 큰 칠면조 오븐구이는 당연히 있을 테고, 그레이비와 스터빙도 준비되어 있다고 예상하면, 먹게 될 음식 대부분이 기름지고 무거울 것 같기 때문이다. 예쁘고 맛깔 나는 한국 음식을 소개하고, 땡스기빙 음식 코드에 맞으면서도, 겹치지 않을 음식에 단호박조림이 딱이다 싶다. 맛없다는 호박에 대한 미국사람들의 선입견도 깰 겸.


인스타그램에 올렸었던 단호박조림. 프랜즈기빙날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정성들여 요리하고 견과류 데코도 했으나, 정신이 없어서 사진을 못찍었다.


단호박 조림에는 그냥 쪄서만 먹어도 달고 맛있는 단호박이 필수다. 이 단호박은 미국의 일반적인 마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양한 국가의 식재료를 파는 인터내셔널 마트에 가서 단호박을 구매했다. 단호박조림을 꾸밀 견과류도 잊지 않았다. 단호박이 완전히 잠기지 않은 찰랑찰랑 물에 설탕을 조금 넣고 끓여주다가 거의 다 익었다 싶을 때, 꿀을 듬뿍 넣고 졸여 준다. 너무 오래 삶아지면 모양이 뭉개지기 때문에, 전체 조리시간을 20분 정도에 맞췄다.


개인적인 취향은 냉장고에 차갑게 식힌 단호박조림을 선호하지만, 차가운 음식이 생소할 수 있는 미국 친구들을 위해, 준비한 단호박조림을 먹기 전에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처음 보는 음식에 다들 신기해하는 눈치다. 

예상했던 대로 칠면조 구이는 호스트가 먹기 좋게 썰어서 큰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손님들이 집에서 가져온 음식들은 테이블의 빈자리를 채운다. 하나, 둘 씩, 사라지는 단호박조림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달콤하게 반짝, 마음에 떠오른다.




손님들이 가져온 음식들로 하나 둘씩 채워지는 테이블.
이날의 마음 속 베스트 버섯 요리.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집에 모였다. 초대해 준 친구라고 해도 두어 번 만난 것이 전부인지라, 이 친구마저도 썩 편하지 않다. 이 어색한 마당에 새로운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을 보자 숨이 턱 막힌다. 그래도 며칠 동안 담금질해 온 내 안의 검이 스르릉, 고개를 내민다.


“안녕하세요. 저의 영어는 그렇게 완벽하지 못해요.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서 이야기해 볼 테니, 제 말에 너무 어색해 하지 말아주세요.”


소파에 앉자마자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불쑥 꺼낸 한 마디. 파티 내내 붙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언어장벽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내놓고 나니, 나도 편하고 듣는 이도 편해졌다.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쉬운 단어를 써준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는데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에는 늘 큰 에너지가 든다.


30대에 시작한 미국살이, 새로운 언어를 배울 뇌의 영역은 굳어져 있고, 사람과의 교류가 제한적인 프리랜서라는 직업으로 영어는 더디게 는다. 집중하지 못해 영어가 귀를 흘러가버리는 순간에는 얼굴이 벌개져서는 당황하게 된다. 못 들을 수도 있지 못나게 왜 그래, 스스로 하는 질책은 한 참 뒤에 올 담금질의 시간일 뿐, 이 순간의 나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날은 내가 먼저 나를 먼저 구원하기로 한다. 갑옷을 벗어 던지는 순간은 미지의 공격에 불안하고 두렵다. 그러나 감싸고 있던 갑옷을 벗고서, 나를 조금 들어내 보이니, 비로소 상대방도 자신의 방패를 내려놓는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나처럼 요리를 좋아하고-특히 한국요리에 관심이 엄청났다-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친구다. 


새로운 사람과의 대화와 파티에 대한 긴장감이 조금 누그러지자, 친구집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면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얼추 20명을 되는 듯하다. 호스트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와인을 잔에 채우는 사람, 데려온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 음식에 집중하는 사람, 그리고 대화에 끼려고 노력하는 사람, 노력해도 대화에 낄 수 없어 당황하기 시작한 사람, 어색하게 서서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 어울리기를 포기하고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 


나는 이들 중, 영어에 서툴지만 운이 좋게 취향이 맞는 사람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레즈비언커플도 있고, 게이커플도 있다. 친근한 태도지만, 사회적 시선에 대한 묘한 경계심이 보인다. 이들의 아이들은 울다, 웃다, 싸우다를 반복하며 파티의 시끌벅점함을 더한다.


미국에 살면서 처음으로 깨달은 사실-머리로만 외웠던 그 사실-정말 사람 사는 것은 어디서나 비슷하다는 것. 그들도 나처럼 사람과의 만남이 어색하고, 낯설고, 두렵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다가가면, 상대방도 나에게 온다, 그동안 살면서 수도 없이 겪었을 ‘교류’에 대한 지침이었을 터인데. 


용기 내어 혼신의 ‘예스’를 하고 나니, 교류를 대하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맛있는 음식과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유쾌한 파티, 프렌즈기빙에서 나는 정말 친구를 선물로 받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 할로윈데이 속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