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필립로스 <에브리맨>
열심히 사는 친구의 프로필 배경에 대수롭지 않는 듯 툭, 뱉어진 글 귀 하나가 가슴에 푹, 박혔다. 아, 나는 아마추어인가. 이제 꽤 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아마추어라면 어쩌란 말인가. 며칠을 죽을 쑤듯, 아니 정말 죽을 쑤듯이, 아주 오래 고민을 하고 말았다.
나는 실제로 영감을 찾아 헤맨다. 9 to 6, 일을 풀타임으로 끝낸 후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증명해 낼 때 보다, 노트와 연필을 들고 강가에 앉아 바람이 던져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과의 끈끈함 증명해 낼 때, 삶이 더 풍요로워 진다. 말이 많았다, 개미보다 베짱이의 삶이 더 좋다, 이거다.
베짱이의 삶은 틀림없이, 종국에는 개미에게 빌붙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눈물을 짓게 될 터인데. 새삼 조급해 지는 마음들.
남들 다 잘 때 일하고, 일할 때 또 일 해보기도 했다. 그렇다.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갔다. 그러나 개미가 뭐, 개미도 행복하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늘 교훈적이다. 휴가는 악마의 잼 보다 달콤하고, 보상은 스쳐 지나가나 보람차다. 퇴근 후 삼겹살과 소주는 천국,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개미는 몸을 끌고 욕실로 향해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할 때 마다 개미는 늘 생각한다. 물 먼저 마시고 샤워할 걸. 밥보다 잠을 선택한 개미는 늘 배가 고프다. 식탐이 많은 개미라서 그렇다. 큰 맘 먹고 김밥 한 줄이라도 사간 날에는, 사무실에서 눈치를 보며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맛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어쩐지 과감하게 노점에서 뜨끈한 어묵 하나를 먹는 날이면, 매번 타던 지하철을 놓치고 겨울에도 땀을 비처럼 쏟으며 전력질주를 한다. 휴, 세이프. 밥은 무슨 밥이냐, 커피나 마시자. 믹스커피 두 봉을 빈속에 털어 넣는다. 개미의 다이내믹한 회한이 담긴 믹스커피 두 봉은 의식처럼, 그날의 시작을 알린다.
개미는 어느 날, 매일 가던 출근길에서 뜻밖의 행복을 마주한다. 그날따라 햇살이 아름답게 땅으로 떨어진 것이다. 출근길 늘 침착했던 가슴이 벌렁벌렁하다. 아, 이 무슨 삶이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하단 말인가! 이 차가운 공기는 어쩜 이렇게 청렴하고 반듯하게 내 폐 속으로 들어오는지! 구두소리는 내가 들어도 근면성실하다! 아, 나는 정말 근면성실한 차가운 도시여자! 드라마에서 왜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며 눈을 찡긋거리는 장면이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지 알겠다. 영감님께서 개미 속을 파고들었던 날이다.
여왕을 위한 삶이지만, 개미의 삶은 이대로 경이롭다. 이 소명은 개미만이 경건하게 끝맺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식탐이 많았던 한 개미는 어쩐지 점점 더 배가 고파져 갔다. 개미의 겸손한 근면성실함은 힘을 잃어가고 베짱이의 노래가 부럽기 시작했다. 개미는 점점 여왕이 미워지기 시작한다. 배가 고픈 개미는 여왕에게 바쳐야할 공물을 스스로 먹기 시작했다.
식탐의 많았던 이 개미는 탈선하여 베짱이가 된다. 식탐이 이렇게 탈이 날 줄은 진즉에 알았던 일이다. 아슬아슬한 줄 타기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베짱이. 여왕에게 바쳐야할 공물을 먹으며 노래를 부르는 베짱이는 언젠가, 오롯이 자기만의 밭을 일굴 수 있을까. 근면성실한 베짱이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혹, 그 노동요가 슬프지는 않을까.
베짱이는 영감이 치고 들어오는 날을 소중히 여긴다. 똑 부러지게 그날의 노동 앞에 매여 있다가도, 영감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면 울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지 않는다. 영감의 파도에 띄워진 배는 둥둥둥, 바다를 항해한다. 멀미도 있다. 그러나 베짱이에게도 소명이 있다고 믿으며 그 파도에 몸을 맡긴다.-잉여의 시간을 보낸다는 뜻이다-그렇다고 무슨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성의 파도가 들썩인 날에는, 지식을 탐욕스럽게 탐구하고 싶어진다. 책을 더 읽고 싶다. 미뤄 뒀던 일본어 공부를 하고 싶다. 한국의 근대사를 제대로 알고 싶다. 살고 있는 미국의 역사도 제대로 알아야 할 것 같다. 화석은 정말 매혹적이다. 우주가 무섭도록 궁금하다. 무한대의 지식 탐구만이 삶의 유일한 이유인 것 만 같다. 상상의 파도도 밀려온다. 가장 이상적인 공간과 삶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펼쳐진다.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이 있다. 그 주인공의 시작과 끝을 보고 싶다. 우울의 파도도 있다. 그 시꺼먼 구덩이는 조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
니는 그마이 눈물이 많아가 이 험난한 세상 우째 살아 갈라고 그라노?
15살, 약도 없는 중2병에 시달리며 세상 예민할 때, 흰머리 한 개에 50원 알바를 하며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던 중, 무슨 이유였던지 눈물을 똑똑 흘리는 나에게 엄마가 내민 질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오랫동안 마음을 맴돌았다. 그래요, 엄마. 이 울렁이는 마음으로 계속 살아도 우째, 괜찮을까요.
내 머리에도 나기 시작하는 흰머린지 새치인지-노화를 인정 안하는 30대의 절박함-를 뽑을 때마다 엄마의 그 질문이 예고 없이 날아와 아직까지도 마음에 두둥실 떠오른다.
망할 놈에 영감탱이, 꼭 이렇게 불쑥불쑥 쳐들어와 삶을 들쑤셔 놓고 떠나가 버리지.-해보고 싶었던 대사-이 모든 애증의 영감은 어쩔 수 없이 기록되어, 기억되어 진다. 만약, 이 순간들이 확장되어 풍요로워 질수 있다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