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에 큰 나무들이 덩실덩실 춤을 춘다. 커피를 내리며 부엌에 난 작은 창문을 곁눈질로 홀긋거려 본다. 창문을 열면 쌀쌀할 것 같은데. 청명했던 초록의 잎사귀들은 가을필터를 낀 마냥 색이 바랬다. 나무들이 바람에 또 덩실덩실. 얼마나 좋길래.
커피를 다 내리기도 전에 동하여 조급해진 마음. 우잇차. 아래서 위로 여는 오래된 미국 아파트의 창문은 세월만큼 무거워져서는, ‘창문을 여는 행위’에 꾹, 방점을 찍더니, 밖에서 덩실거리던 바람을 훅, 하니 우리집 부엌으로 실어 보낸다.
가을바람.
아직 덜 마른 내 머리칼을 느긋하게 날린다. 음. 가을바람이다. 맞다, 이랬지. 이렇게 마음을 어디론가 날려 보냈었지.
한국에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추석을 떠들썩하게 지내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후, 며칠간은 안간힘을 썼다. 어딜 가든, 어디로 향하든, 뒤에 남을 것은 남아버린다. 날씨는 뭘 붙잡고 늘어진 듯, 내가 떠나기 전보다 웬일인지 더 더워져서는 지루하게 흘러갔다. 이렇게 지루한 날씨가 있었던가.
요 며칠 새 바람이 바뀐 것이다. 정처 없이 지루하기만 했던 마음이 서걱거리기 시작한다. 한 동안 생각나지도 않았던 음악이 듣고 싶어진다. 랜덤 플레이로 틀어놓고 멀티태스킹 하던 귀를 잡은 노래 하나만 1시간, 2시간이고 듣는다. 울림이 커져만 간다.
서걱, 서걱. 필요한 것만 겨우 해내고, 진짜 해야 할 것은 제쳐뒀던 마음이다. 몇 달을 미뤄뒀던 건전지를 샀다. 거실에, 데스크에 걸쳐둔 와이어 전구에 들어가는 건전지다. 켤 때마다 아이처럼 기뻐지는 반짝반짝 꼬마전구. 할로윈데이 그거 뭐, 했던 기분은 저만치 떠나고 모형 거미가 담긴 전구를 사서 걸었다.
고구마를 샀다. 친구 녀석이 먹어보라고 준 고구마를 한국에서 못 먹고 왔다. 아빠에게 전화해서 그 고구마를 꼭 먹어보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나도 한국마트에서 한국 고구마를 샀다. 미국 고구마는 한국 고구마랑 맛이 다르다. 오븐에 넣고서 1시간, 큰 고구마라 익는 시간이 걸린다. 꺼내어보니 영락없는 군고구마다. 다음은 군밤인가.
고등어도 샀다. 한동안 인스턴트 음식도 귀찮았던 마음이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고등어를 껍질부터 바삭하게 익혀, 앞뒤로 노릇노릇. 알맞게 구어 진 고등어에 와사비를 살짝 올려 먹었다. 고등어가 이렇게 맛있었나 보다.
한국마트에서 눈에 띄어버린 갈비도 사다가, 양념에 재워두었다. 갈비를 양념에 재워두는 것을 깜빡했던 추석날 새벽, 눈을 번쩍 떠 기어코 양념을 재워뒀던 행동력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그 레시피 그대로 양파, 마늘, 고추, 생강 그리고 한 개 남은 복숭아를 함께 갈았다. 여기에 간장과 후추, 설탕을 넣어 갈비를 재워두면 된다. 먹지는 않았다. 그대로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나중에, 꼭 먹고 싶을 때, 그때 먹을 것이다.
평소처럼 먹는 것에 대한 열의가 돌아오고, 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할 때 쯤, 가을바람이 덩실거리며 우리집 부엌으로 들어온 것이다. 갓 내린 커피향이 바람을 타고 온 집안을 흘러 다닌다. 생각한 것만큼 쌀쌀한 바람이다. 창문을 그대로 열어두고 서걱거리는 마음의 정체를 파헤쳐 본다. 가장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모처럼 즐겁다.
손끝이 살짝 차갑다. 부르르 떨리는 몸인지 마음인지를 작년에 사두었던 숄더로 덮어본다. 이럴 때 덮으려고 산 숄더다. 온기를 잃어가는 커피컵에 뚜껑도 덮었다. 같은 노래는 매번 다르게 들린다. 비오는 날 촉촉하게 젖어들었던 루프탑 콘서트만큼 서걱거리는 마음.
깊어가는 가을 밤, 군밤을 구우면 더 꼬수울까. 오늘은 큰 장문에 꼬마전구를 달아야지. 향초는 화학성분이 없는 것을 꼼꼼하게 골라서 사볼까. 계피향이 나는 커피가 이맘때쯤이면 나와 있던가. 맛은 없지만 가을의 향이니까.
가을하늘과 맞닿은 나뭇잎들은 흔들흔들, 더욱 선명한 가을의 색을 입고서 반짝거린다. 서걱, 서걱, 서걱. 마음이 이렇게 서걱거려서 어쩔 수 없이, 사각거려보는 어느 가을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