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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숲 Dec 31. 2018

나는 ‘21세기 고양이’와 산다

고양이와 산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고양이가 뜬금없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거나, 포슬하고 뜨끈한 몸을 나에게 밀착시켜 잠들기 시작하면, 꼼짝없이 고양이 전용 침대나 소파가 되는 마법에 빠져들고 만다. 


인간과 더불어 사는 애완동물과 자연 속 야생의 본능, 그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21세기의 고양이, 이 생명체가 인간에게 주는 호의는 그래서 더 특별하다. 시큰둥한 고양이가 주는 이 황송한 호의를 어찌 그냥 무시할 수 있으랴. 



39도를 품은 몸뚱이를 나에게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뭉개는 나머지, 땀이 삐질삐질 나더라도 이불을 걷을 수 없는 황홀한 고문. 팔을 베고 잠든 깃털 같은 머리통이 점점 무거워져 한쪽 팔이 마비가 오더라도, 내 팔 아닌양 무시할 수밖에 없는 셀프 인내심 테스트.


그렇게 호의를 베풀며 한 잠 주무신 나의 고양이 키라라는 조용히 일어나, 얼굴한번 보는 일 없이 유유히 제 할 일을 하러 떠난다. 그리고 이부자리에 남긴 온도에 속도 없이 내 몸을 삐적 대며 느끼는 39도의 행복.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는 생명체가 아니기에-스스로 원하면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간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타이밍이 있다-와 주는 게 고맙고, 가지 않아 주는 것도 고맙다.




고양이는 훈련시키기 어려운 동물이라 한다. 그렇다. 고양이에는 ‘훈련’이라는 단어가 통하지 않는다. 강압적인 어떠한 방법과 요소들은 무용지물이다. 강제하면 할수록 고양이는 거부하고, 상처받으며, 떠나간다.


특정 언어와 몸짓에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 ‘교감’이라 하면 어떨까. 키라라와 나에게는 13년 동안 자연스러운 교감으로 쌓은 몇 가지의 언어와 몸짓이 있다.



가장 많은 교감은 단연 이름, 키라라.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획 돌려 나를 바라본다. 어떤 고양이는 이름을 무시하거나, 꼬리만 살랑, 흔들어 주기도 한다. 내 고양이는 이름을 몰라, 과연 그럴까. 이름을 부른다고 돌아봐야 줄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키라라, 이리와! 

이 소리에는 멀리 있다가 꼬리를 세우며 총총 걸어온다.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처럼 보이지만, 한 끗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미묘한 자리에 꽁하니 앉아서 왜 불렀니, 멀뚱히 나를 바라본다. 다시 한 번 이리와, 하고 내 곁자리에 손을 팡팡 두드리면, 바로는 아니더라도 은근히 와서는 엉뎅이를 내 몸에 바싹 붙이고 비스듬히 눕곤 한다. 


맛있는 것 줄까? 

이 것 또한 키라라가 반응하는 문장 중 하나다. 아침에 부엌에서 커피를 내릴 때 마다, 자기 차례는 기가 막히게 알고는 야옹-을 외쳐댄다. 나는 이때다 싶어, 조금 애를 태우다 맛있는 것 줄까? 하면 야아-옹! 하고 대차게 대답을 한다. 그래 너 다 줄게, 더 다 먹어.


나가!

물을 싫어하는 대도 내가 화장실에 있을 때마다 젖은 욕조를 탐험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매일 같은 욕조일 텐데도. 젖은 발로 키라라가 모래화장실을 파면, 온 집안을 모래 천국으로 만든다. 굳이 언성을 높이지 않은, 나가, 한 마디면 몸을 획 돌려 화장실을 나간다. 혹시 나가, 이 말을 들을 심산으로 그러는 것인지, 고민에 빠진다. 


뒹굴러.

하이톤으로 뒹굴러, 외치면 키라라가 가끔 뒹군다. 이 단어는 키라라의 기분을 잘 살펴가며 사용해야 한다. 똥꼬발랄할 적에는 뒹굴러, 단어에 자주 뒹굴러 줬는데, 키라라옹께서는 이제 귀찮다 싶은 웬만한 일은 가볍게 무시해 주신다. 언제는 나도 오늘은 꼭 보겠다는 일념으로 뒹굴러를 쫓아다니며 외쳤는데, 키라라가 한 참을 피해 다니다가 눈이 뾰로통한 일자가 되어서는 그래 옛다, 하며 머리를 콩 하니 바닥에 박으며 뒹굴러 준 적 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한 참을 칭찬했더랬다.




훈련이라고 하면, 키라라가 꽤 재능이 있다. 나를 아주 귀신같이 알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든다. 발로 이불을 북북, 긁어대면 이불을 빼꼼이 열어 문을 만들어 드려야 하고, 밥그릇을 박박, 긁으면 밥이 남아 있더라도 신선한 사료를 채워드려야 한다. 새벽 3시나 4시쯤 밥그릇을 박박 긁을 때가 있다. 빈 밥그릇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성향을 이용하는 행동인데, 그때는 오늘따라 이 새벽에 본인이 심심하니 일어나라는 뜻이다. 일부러 못들은 척 무시하다가 몇 분이고 포기하지 않는 밥그릇 장단에 결국 몸을 뒤척이면, 일어났니, 하며 스르륵 배 위로 올라와 꾹꾹이를 시전하신다. 꾹꾹이를 시전하시는데, 어찌 무시할까. 원할 때까지 실컷 쓰다듬어 주면 그제야 만족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또 문을 박박박박 긁으면 이문을 열라, 소린데 열릴 제치고 열어드린다. 창문도 마찬가지다. 곁을 맴돌며 끊임없이 하는 야옹은 지금 당장 놀아달라는 뜻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의 팔에 본인의 앞발을 살포시 올려놓을 때도 놀아달라는 뜻이다. 인스턴트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를 뚫어져라 보며, 호시탐탐 커피컵을 노리면, 자기도 커피타임을 갖고 싶다는 의미다. 고양이는 커피를 먹으면 안되기 때문에, 컵에 커피향만 나도록 커피를 살짝 묻혀 드려야 한다. 오로지 인스턴스커피만이다. 커피 취향이 매우 확고하다.


집 주변을 숨어다니는 키라라를 몰래 바라보는 조바심나는 마음.


캘리포니아 살적에는, 키라라가 자율적으로 야외 산책을 하며 들랑날랑 거렸다. 하루 종일 집에 꽁냥꽁냥 붙어 있다가 문을 열라, 박박 긁고 미련 없이 밖을 나가는 키라라를 보며 왠지 모를 조바심이 났었다.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만, 키라라가 갖고 싶어 하는 혼자만의 시간이 불안하고 섭섭한 기분. 


꽤 오랜 시간 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걱정이 되어 밖으로 나가보는데 키라라는 온데 간데 자취를 감췄다. 고양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키라라도 틀림없이 잘했다. 


키라라의 이름을 몇 번 부르면 어디선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며 나에게 다가오는 키라라다. 어떨 때는 네 발에 진흙을 잔뜩 묻혀 돌아오며 격렬한 모험의 흔적을 보여주곤 했는데, 어딜 간 거야, 뭘 보고 온 거야, 물어봐도 호기심에 동그랗게 빛나는 눈은 묵묵부답이다. 그저 키라라의 또 다른 세계를 존중하는 수밖에. 다시 나에게 돌아온 것에 고맙다 할 수 밖에.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지만, 인간과 함께하는 삶이 생존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깨우친 21세기 고양이는 그렇게 인간에게로 되돌아온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나와 사회화 되어주는 시큰둥한 고양이가 사랑스럽다. 혼자서도 잘 살 것 같으면서도 나 없으면 슬퍼할 것 같은 요 독보적인 존재에 매료되고야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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