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린숲 Nov 09. 2018

고양이가 음미하는 늦가을의 낭만

고양이는 햇살 환히 들어오는 따뜻한 창가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글쎄, 나의 고양이 키라라는 신선한 바람이 부는 창가를 좋아한다. 햇살을 즐기고 있구나, 하는 순간보다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즐기는 구나, 하는 순간이 많다. 그것도 미적지근한 온도의 창가는 사절인 모양이다. 바람이 선선해지는 가을이 되면 창문을 열어 달라, 보채기 시작한다.


노트북 데스크 바로 앞에 나있는 창문을 열면 찬 가을바람이 훅- 들어온다. 이제 제법 쌀쌀한 바람인데, 키라라의 털옷은 이제 제 계절을 만났양, 보슬보슬 따뜻하게도 흩날린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창가에 갔다가, 밥을 먹었다가, 집 안을 어슬렁거렸다가, 창가로 갔다가, 물을 마시다가, 창가로 갔다가. 찬바람에 노트북을 두드리는 손끝이 시려, 창문 앞이 비어있다 싶으면 냉큼 달려가 창문을 닫지만, 그러면 또 키라라는 쪼르르 달려들어 창문을 열라며 긁어댄다. 귀신 같이 녀석. 창문 앞에서 키라라와 아웅다웅 하는 소소한 일상이 즐거운 계절이다.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은 키라라가 창가를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창문 앞에서 사계절의 수채화를 그리는 큰 나무는, 이제 선명한 가을의 낙엽을 하나, 둘씩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창문 앞에 하늘하늘 떨어지는 낙엽에 키라라는 신이나 죽겠는 모양이다. 사냥본능이 깨어나는지 낙엽을 보며 가갸갹, 채터링을 한다. 바람이라도 쌩-하니 불면 벚꽃이 흩날리는 것처럼, 그렇지만 시간의 묵직함을 안은 낙엽이 하늘에서 쏟아진다. 바람이 한 곳에 머물며 회오리 춤을 추면, 낙엽은 바람의 모양을 그리며 신명나게 떨어진다. 어떤 낙엽이 더 흥미로운지 가늠이 안 되는 키라라는 낙엽들을 정신없이 눈으로 쫒는다.


어떤 날에는, 1시간이 넘게 창문 앞에 붙어 있다. 자고 있나싶어 슬쩍 보면 그 자세 그대로 하늘을 보다, 나무를 보다, 낙엽을 보다,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다, 가을바람을 만끽하고 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달려가서 꼭 안아 주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나지만, 모처럼 즐기고 있는 사색의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잠자코 앉아 키라라와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름답구나. 너도 아름다운 계절을 음미중이구나. 키라라의 눈을 통해 바라본 늦가을의 색채가 섬세하게 쪼개져 아름답게 부서진다.



창문에 드는 바람이 꼭 마음에 들었던 날, 키라라는 그대로 스르륵, 턱을 괴고 잠이 든다. 얼굴을 창문 앞에 그대로 둔 채다. 경계심이 많은 키라라가 야외에 그대로 노출되는 창문 앞에 얼굴을 들이 밀고 자는 일은 좀체 없다. 이제 좀 창문을 닫을까 싶지만, 키라라의 낭만적인 낮잠을 깨워 버릴까봐 전기담요를 꺼내 덮는다.




창가의 바람으로 성이 차지 않았던지, 집 문을 긁기 시작하면 또 문을 열어드려야 한다. 집요한 구석이 있는 녀석과 기싸움을 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것을 13년 동안 체득한 터다. 지금 사는 집은 문을 열어도, 복도에 난 문을 한 번 더 열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키라라, 창문에 있다가 집 문을 긁었다는 것은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의미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나가기 싫으면서도, 나가고 싶은 키라라를 위해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키라라가 불안하지 않도록 뒷발을 내 손위에 올려 끌어안아 낙엽이 지는 나무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목줄을 하고 야외 산책이 가능한 키라라지만, 진드기 때문에 몇 달을 고생을 했던 터라 아쉽지만 산책은 포기했다. 캘리포니아 살적에는 진드기 걱정이 없었는데, 이 동네에는 진드기가 기승이다.


키라라는 불안감을 느끼면 몸을 부르르 떨기 때문에, 감싸 안은 팔의 감촉에 신경을 집중해 본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을 편안하게 나에게 맡겼다. 오호, 그렇단 말이지. 천천히 낙엽이 떨어지는 나무 밑으로 걸어들어 갔다. 눈앞에 떨어지는 낙엽들에 키라라의 고개가 정신이 없다. 늘 보는 다람쥐는 이제 그러려니 하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다. 바람을 타고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키라라가 야옹- 경의를 표한다. 내 품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없다. 집사를 최대치로 활용한다.


10분 정도 가을을 만끽 한 후, 답답한 내 품을 벗어나 가을 속으로 뛰어들 기세가 될 때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뗐다. 바스락 거리는 낙엽 위로 키라라의 폭신한 발이 닿으면 얼마나 짜릿할까, 진드기의 공포로 행복한 상상에만 그친다.


이제 바람이 조금만 더 쌀쌀해지면 더 이상 창문을 열어 달라 긁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손끝이, 코끝이 조금 시리더라도 키라라에게 늦가을의 낭만을 아낌없이 내어 주리라.


매거진의 이전글 고양이, 미국 동물병원을 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