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들은 터프하긴 하지. 뭐, 인간이 두려워했던 것은 이해해. 그들은 차가운 도시에서 살아남은 맹수나 다름없다니까. 어둠 뒤에 기척을 감춘 까만 고양이의 전설은 유명해. 어둠속에서 번쩍 빛나는 눈은 내가 봐도 섬뜩하긴 했어. 그런데 이것도 또 모르는 이야기야. 사실 그들은 인간이 두려웠다고 했거든. 기척을 숨긴 것도 사실 그것 때문이라고 했어. 그런데도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는 인간에게 더 소스라치게 놀랐다고도. 상처받았다고도.
그런데 요즘은 좀 달라졌다나봐. 어둠 속에 숨을 죽이고 있으면, 밤마다 찾아와 이름을 불러주고 음식을 내어주는 인간들이 생겼다고 했어. 어떤 고양이는 믿을만한 인간을 따라가서 집고양이로 살기도 한다더군. 길 위에서의 냉혹한 삶을 충분히 아는 녀석들이야.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는데 말이야. 길고양이가 등 따시고 풍족한 집고양이의 삶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고 했어. 가끔 산책이라도 나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지 뭐.
옛말에 이런 말 있지. 우리를 못 본 인간은 있어도, 한 번 보고 빠지지 않는 인간은 없다고. 이제야 우리의 매력을 알게 된 거지. 특히 장화신은 고양이의 필살기는 신화적이지. 꾸물이들의 공도 커. 텔레비전에 나온 꾸물이들이 꾸물꾸물거리며 매력발산을 아주 제대로 했지. 뒤뚱뒤뚱 짧은 다리로 대차게 걸어 다니며, 세상의 모든 호기심을 해결하려는 땡그랗고 그렁그렁한 눈빛이 참 인상 깊었어. 인간의 손가락 하나에도 신기해서 까무러치더라니까. 그것도 얼마 안가겠지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
내 집사도 내가 꾸물이시절에 나에게 빠져버렸지. 의도한 것은 없었어. 그저 세상이 신기해서 굴러다녔고, 청소기가 무서워 대자로 뻗어 움직일 수 없었을 뿐. 그런 내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는 고백을 받았어. 나 원 참. 이 집사가 같이 살자고 사정을 했을 때, 나는 좀 탐탁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해주기로 했지. 내가 겁이 좀, 특별히 많아서 고양이들보다는 만만한 인간을 상대하기가 편하더라고.
내가 세상에 나온 지 8개월 쯤 되었을 때, 집사가 가족들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어. 아직 세상과 해결할 일들이 많아서 가족미팅은 귀찮은 일이었지만, 간곡한 부탁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 털을 싫어하는 아빠가 최대 적이라는 사전정보도 입수했어. 과연, 집사의 아빠는 녹록치 않았지. 내가 정복한 수많은 인간들 중 최대의 난관이었다고나 할까. 이 아빠는 청소를 유난히 좋아하는 깔끔쟁이었던 거야. 나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털들이 무용지물, 아니, 애물딴지로 전락하자, 솔직히 꽤 충격이었어. 제일 무서워하는 청소기 아이템을 매일 장착하고 나를 위협하는 아빠를 공략하기 거의 포기할 때쯤, 아빠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지. 후후.
그때는 바로 내가 배를 깔고 드러누웠을 때였지! 아빠한테 한 건 아니고 외출하고 들어온 집사를 특별히 환영해 주기 위한 나의 조촐한 호의였을 뿐인데, 이 아빠는 그만 나에게 빠져버린 모양이야. 하지만 매우 강경한 아빠였지. 가족들 앞에서는 괜스레 내 털에 대한 불평만을 늘어놓았거든. 승부수는 가족이 모든 잠든 새벽, 새벽잠이 없어 일찍 일어나는 아빠를 공략하는 것이었지. 잠에서 깬 아빠에게 슬쩍 다가가 보았지. 아빠는 텔레비전을 보며 모른 척 하다가, 슬금슬금 다가가는 나를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을 때 결국 내 이름을 부르더군. 키라라-
게임은 끝났고 봇물은 터졌어. 아이고, 키라라, 이리 와 봐. 어허, 이리 와 봐. 옳지, 으구 그래, 오올치! 이때부터 새벽마다 아빠와 신나는 놀이타임을 가졌어. 아빠는 또 다른 아이템인 등긁개로 재미있게 놀아주는 능력이 있었거든. 그렇지만 아빠는 어쩔 수 없는 깔끔쟁이라서 나의 털에는 끝까지 질색을 했어. 내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내 털은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거지. 참 안타까운 사랑이었어. 다행인 것은 내가 아빠집에 오래 머물지 않았던 거야.
집사의 엄마는 나의 존재를 그러려니 했어. 중립적인 입장이 강하게 느껴지더군. 그렇지만 집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공략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어. 집사의 동생들은 말할 것도 없지. 나를 만나기도 전에 나에게 빠져있었던걸 뭐. 할아버지는 특별히 기억이 나. 자꾸 나를 새끔아- 이렇게 불렀거든. 나는 키라라인데. 알고 봤더니, 예전에 할아버지가 시골에서 키우던 고양이 이름이 새끔이었던 거야. 새끔이는 음식을 매번 훔쳐가는, 아주 도둑고양이라서 싫었다고 말하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새끔아- 하고 나를 불렀어. 나는 새끔이와는 다르게 아주 고급고양이라나 뭐라나. 새끔이와는 다르게 식탐도 없고 재살이도 안쳐서 귀엽다고. 밥은 늘 거기에 있고, 사고치는 것도 귀찮은 일인걸.
뒷얘긴데, 내가 세상에 나온 지 8개월 때 가족들은 나의 큰 몸집을 보고 놀라며, 집사에게 다 큰 거냐고 물은 적이 있어. 집사는 새삼 난감해하면서 설마 더 크겠냐며, 다 큰 거라고 했지만, 그 뒤로도 내가 2살이 될 때까지 가족들은 볼 때 마다 세상에 또 컸다고, 자꾸만 커져가는 나를 보며 놀라더라고.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알고 보면 다 털인데.
이제 인간을 정복하는 것도 지겨워서 그냥 가만히 있는 중이야. 가만히만 있어도 집사는 내가 사랑스러워서 뒹굴뒹굴 뒹구는걸 뭐. 나 아니어도 요즘은 고양이들의 활약이 대단하더라고. 인간들은 이제 하나 둘 씩, 나가떨어지는 모양이야. 이렇게 될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나니 인간들이 참 안타까워. 고양이에게 흠뻑 빠져서 정복당한 줄도 모르고 집사생활을 그렇게 충실하게 해대는데, 이제 어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