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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숲 Jun 14. 2018

햇살 좋은 날에도 종종거리는 발걸음에는 긴장감이 흐른다

미국생활 3년차, 동경했던 타국살이는 설레는 여행에서 어느덧 생활이 되어 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보였던 ‘허니문타임’은 끝이 나고, 나는 이곳에서 매일을 살아간다.


고요한 아침을 위한 고요한 알람소리에 삐적삐적 일어나,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문 밖을 나선다. 후-공기는 늘 좋단 말이야.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에는 웬일인지 늘 서울의 분주했던 아침이 떠오른다. 뻑적지근한 어깨를 뒤로 한 번 쭈욱 편 뒤 어슬렁거리며 걷는 발걸음에 맞춰 눈곱을 떼어낸다.


자, 이제 좀 빨리 걸어볼까. 빨라진 발걸음에 허리춤 채워둔 물통에서 물소리가 짤랑짤랑 들려온다. 눈을 마주치자 꼬리를 하늘로 꼿꼿이 세우고 곧장 총총거리며 다가왔던 어제 만난 하얀 고양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아침 조깅을 하는 농구코트가 저 멀리 보인다. 주변이 온통 숲이고 초록이라 선택했지만, 더 큰 이유는 사방에 감시카메라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곳으로 이사하기 전, 아파트 주변 트레킹 코스에서 나를 추행했었던 누런이에 시꺼먼 얼굴의 노인. 몇 번은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인사를 했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멈춰 세워 말을 건넨다. 노인은 금방 나의 영어가 서툴다는 것을 눈치 챈다. 어눌한 영어에 나조차 쉬워 보였던걸까. 갑자기 그는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나를 끌어당긴다. 내 가슴이 그의 팔에 닿는다. 너무 놀라 밀어내자, 그는 내 손목을 강하게 잡는다. 파란하늘, 쨍 한 햇살, 초록의 아침조깅이 순식간에 지옥이 되었다.


싫어! 최대한 강하게 손목을 뿌리치고, 뒤 돌아 놀란 토끼처럼 펄쩍펄쩍 도망가기 시작했다. 내 등 뒤에서는 만나서 반가웠어! 조롱의 목소리가 울려 펴진다. 뒤 돌아 보는 것조차 두렵다. 따라 잡힐까, 전 속력으로 집을 향해 뛰어간다.


이렇게 밝은데? 사방이 다 뚫려 있는데?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간혹 지나가는데? 친절하게 인사도 했었는데, 왜?!


두려움에 엉망이 된 머릿속이 같은 질문을 진흙탕처럼 쏟아대는 사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집 열쇠를 겨우 구멍에 끼워 넣는다. 집 안에 들어서자 풀려버린 다리는 털썩, 눈물이 쏟아진다. 두려움의 눈물이 어느덧 분노, 자책의 눈물로 바뀌어 간다. 왜, 아무 말도 못했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아침 조깅시간과 그 곳에서 가장 사랑했던 트래킹 코스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한 주, 두 주, 시간이 흐르자 그를 다시 마주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국 두려움과 분노로 뒤엉킨 마음으로 그때 그 지옥으로 조깅을 나섰다. 그를 만난다면 소리 지를 것이다. 날 뭐로 보고 그런 짓을 했냐고,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냐고, 큰 소리로 말할 것이다.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뛰지 않았는데도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해야 할 말들을 되뇌었다. 그 일을 하지 않고서는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놀란 가슴 부여잡고 도망 다니는 토끼일 것이다.


트래킹 코스 초입에 있는 놀이터 미끄럼틀 위에 누가 앉아 있다. 설마, 그 다! 심장이 몸 전체로 울려댄다.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그 곳으로 향했다. 놀이터가 가까워질수록 분노는 더욱 요동친다. 미끄럼틀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이 보인다. 준비 했던 말을 큰 소리로 모조리 다 쏟아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두려움은 아니다.


나는 네가 말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가 말한다. 헛소리 하지 마! 나의 외침에 그가 다시 차분하게 말한다. 일어설 테니, 내가 정말 그 사람이 맞는지 자세히 봐줄래? 그가 천천히 일어서자 그늘에 가려 있었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세상에, 그가 아니다.


아! 오늘 만난 모든 얼굴이 그로 보였을까! 절망감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른다. 그 남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은 허리를 다쳐 빨리 뛸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일이 있었던 장소로 함께 가줄 수 있다고도 말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모든 전의를 잃고서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마음먹은 대로 풀릴 리가 만무하다. 그 제서야 정신이 든다. 아, 이곳은 총기소지가 가능하다. 내가 쏟아내는 말에 그가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다. 이미 그는 나에게 나쁜 마음을 한 번 먹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혼자 가서 육체적으로 이길 수 없는 남자를 도발해서 어쩌겠다는 건지. 경찰과 함께 그 장소로 가던지, 내가 조깅코스를 바꾸는 것이 맞겠지.


그 일이 있지 않았더라도, 나의 외출은 이미 충분히 긴장감과 함께였다. 능숙하지 않은 언어, 낯선 문화, 다른 사람들이 주변을 소용돌이친다. 휩쓸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한 발 한 발 꾹꾹, 힘주어 발을 내딛는다. 모든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다. 그 일이 있은 후에는 한 동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낮이건 밤이건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 알고 있다.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났다. 그런 일들은 인생에서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고, 삶은 다시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이곳에서 영어에 서툰 동양인, 이방인. 공기처럼 당연하게 녹아 있었던 한국이 아니다.


다른 공기가 흐르는 이 곳에서 편안하게 숨을 쉬기 위해, 존재 자체를 공기 중 떠도는 먼지로 만들지 않기 위해, 나는 충분히 강하다, 정신무장은 매일매일 빼놓지 않고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 들, 선택한 일 들, 그리고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하는 본격 쫄보 미국살이.


햇살좋은 날, 따사로운 길, 종종거리는 발걸음에는 항상 긴장감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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