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처음 지내게 됐던 곳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 LA 근교의 작은 도시였다. 그래서 마주했던 미국의 첫인상은 반짝반짝 팜트리와 뜨거운 태양, 마치 휴양지에 온 듯한 설렘과 자유로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캘리포니아는 지역마다 자연환경과 기후가 매우 다르다. 해안 일대는 지중해성기후, 북부지역은 삼림이 많은 해양성기후, 남부 내륙부는 사막기후다. 내가 머물렀던 곳은 연중 사막기후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지역이다.
낮고 날카로운 산 능선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찾아가야 했던 운명의 산, 모르도르를 떠오르게 한다. 멀리 보이는 짙은 회색의 산 능선에는 나무를 찾아 볼 수 없다. 그 대신 낮게 자라는 덤불이 보인다. 생을 다한 덤불은 그대로 말라, 바람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사람이 밀집 된 도심과 가까워질수록 초록잔디로 뒤덮인 낮은 능선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마당에는 24시간, 때 되면 돌아가는 스프링클러가 잔디에 싱그러움을 더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민들레는 이 곳에서도 강인하게 피고 지며 꽃씨 날리기에 분주하고, 꽃집에서 볼법한 알록달록 들꽃도 시선을 잡는다.
네바다주로 향하는 모하비 사막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사막도로 사방에는, 모하비 사막에서만 자란다는 조슈아트리가 사막식생의 생명력으로 메마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잎이 톱니처럼 길게 뻗은 모습이 나무인 듯, 선인장인 듯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영화 마션과 스타워즈의 촬영장소로 촬영된 돌산들은 지구의 것이 아닌 듯 경이롭다.
물론 팜트리가 첫인상부터 아름답기는 했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한 긍정적인 감상은 처음부터 이뤄지진 않았다. 4계절 뚜렷한 한국에서 4계절 사막기후인 이곳에서의 첫 1년은 실로 적응의 시간이었다. 1년 내내 짧은 소매만 입고 다니는 사람들 따라서 짧은 소매를 입고 다니다간 큰 낭패. 가을 아침·저녁은 썰렁하고 한 낮에는 영상 40도까지 올라가는 기온,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날씨에 옷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기도 했다.
습도가 낮아서 기온에 비해 불쾌감은 높지 않지만, 태양에 노출되면 그대로 화상이 염려되는 실로 살인적인 날씨임에는 틀림없다. 한 여름, 모하비사막을 가로질러 드라이브해야 했던 어떤 날에는 진심으로, 생사에 대한 염려를 했었다. 한여름에 모하비 사막 운전은 작열하는 태양이 차안 기온을 높이기 때문에 살인행위라고 불린다. 에어컨을 최대로 켰어도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가져온 물통을 힐끗힐끗, 물의 양을 체크했었다.
겨울이 되면 여름 보다 선선해지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짧은 소매를 입고 다니고, 들쑥날쑥한 날씨는 종을 잡을 수 없다. 한국에서 제일 추울 때나 입었던 오리털점퍼를 꺼냈던 저녁, 그 날의 낮에는 짧은 소매를 입고 카페를 찾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했었다.
거리를 지나갈 때면 미국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모르는 사람들이 밝게 인사를 건넨다. 마트나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친구처럼 인사를 건네며 안부를 묻는다. 어색했던 처음에는 일부러 바쁜 척 핸드폰에 코를 박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머리가 생각할 틈 없이 인사를 먼저 건네고 있다. 쨍한 태양과 아름다운 팜트리처럼 밝은 사람들, 그렇게 느꼈다.
약 2년 정도의 시간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낸 뒤, 워싱턴D.C가 있는 동부로 이사를 왔다.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 서울 같구나.
미국의 수도이면서 계획도시답게 도시는 질서정연하고 깨끗하며, 또 기품이 흐른다. 지하철은 도심을 중심으로 근교 도시와도 잘 연결되어 있다. 지하철과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이 그다지 대중화 되지 않고, 심지어 위험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LA이와는 달리, 이곳의 대중교통은 남녀노소가 부담 없이 이용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의 대중교통만 못하지만. 그러나 면허증이 없기 때문에, 대중교통만으로 생활반경이 확대되었다는 확장감을 오랜만에 느꼈다.
이 곳은 4계절이 뚜렷하고, 나무가 푸르다. 아름다운 기후지만, 한국인으로서 특별할 것은 없다. 다만, 도시 가까이 바다와 밸리가 인접하고 있어 물이 매우 많고 습하다. 아름드리 나무에는 짙은 이끼가 덮여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건조해서 걱정할 일 없었던 곰팡이와의 끈질긴 싸움을 지구력을 가지고 이어간다.
워싱턴D.C가 서울같다고 느낀 이유, 다름 아닌 사람들의 분주함이다. 전반적으로 느긋해 보이고, 웃음기가 있는 캘리포니아 사람들과는 달리, 이 곳 사람들은 대체로 바쁘고 표정이 없다.
어딜 가더라도 미소를 지었던 버릇은 이 곳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그런 내 얼굴을 이상한 사람 보듯, 왜 웃니? 하는 표정.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지 않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 무표정한 직원 앞에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주문은 짧고 신속하게. 지하철 역 안에서 이동할 때는 주춤거리지 않고, 빠르고 정확하게.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 험한 시선에 주눅이 들 수 있다. 사정없이 부딪쳤던 한국의 지하철과 비슷하다. 외국인들에 대한 포용도도 이 곳 동부보다는 서부가 더 높다.
물가도 꽤 비싸서 아무런 정보와 요령이 없었을 때는, 생활비 걱정에 시름시름 앓았다. 물가와 이 곳 사람들의 분위기를 연결시켜 본다. 어딜 가나 먹고 살기 바쁘면,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여유와 미소를 잃는다. 바쁜 도시, 바쁜 사람들.
한편으로는 서부보다 동부에서 사람들을 대하기가 편하기도 하다. 다소 개인적인 성향 때문에 누구의 안부를 묻는다거나 말을 건네는 행위 자체가, 문화적 차이가 아니더라도 어색하다. 외출할 때는 기분전환으로 갖춰 입고 나가는 것을 선호하는 편인데, 동부에서는 이렇게 갖춰 입고 다녀도 튀지 않아서 좋다. 정부기관이 많이 모여 있는 도시, 사람들의 패션은 정중하면서도 감각적이다. 서부 사람들은 기온 때문인지, 성향 때문인지, 대부분 편한 차림이라서 큰 쇼핑센터 주변까지 나가지 않으면 옷차림이 과한가, 고민했던 적이 여러 번이다.
같은 나라 안에서 완전히 다른 자연환경과 문화를 느끼게 되는 경험은, 익숙함을 낯설게 하고 생활을 모험으로 바꾼다. 양날의 검, 생활은 이어져야 하고 모험은 필요하다. 서부 모험가의 자신감에 동화된 동부의 한 소심한 이방인은, 어느덧 발을 땅에 딛고 ‘생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