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역의 인기묘가 다른 고양이를 대처하는 자세
키라라의 산책 생활이 미국에 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무도 없는 시간대에 함께 했던 한국에서의 옥상산책이 미국에 와서 꽃을 피웠다. 옥상산책의 시간을 꽤나 즐겼던 키라라는 밖을 탐험하는 기회가 주어지면 마다하지 않는다. 미지의 세계를 두고, 두려움보다 호기심을 가져주는 것이 기특할 따름.
캘리포니아에서 살던 적, 고양이 산책에 목줄을 해야 된다는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몇 번 함께 산책한 뒤부터는 키라라 혼자 산책을 즐겼다. 산책을 나가고 싶다는 신호는 집 문을 박박 긁고 최대한 귀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문을 열어드린다. 그 동안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내 할 일을 하는데, 매번 들어올 때 되면 들어오는 녀석인데도 조금만 늦어진다 싶으면 마음이 콩닥콩닥 불안해지는 것이다.
보통 산책 시간은 20~30분 정도, 하루 서너 번. 도대체 밖에서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여느처럼 산책을 한다고 문을 긁는 키라라를 위해 집문을 열어드리고, 가만가만 조용조용 키라라의 뒤를 밟아 보았다. 내가 아무리 은밀하게 뒤를 밟는다고 해도 키라라에게 그것을 숨길 수는 없다. 다만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기척을 숨겨 키라라가 나를 지나치게 신경쓰지 않도록 했다.
처음에는 뒤를 밟는 나를 홀끗홀끗 돌아보며 확인하다가, 이내 내가 그저 녀석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신경을 크게 쓰지 않는다. 2층 집,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는 모습에 주저함이 없다. 집 앞은 주차장이라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만, 바로 옆에 심어져 있는 덤불들 사이로 몸을 숨기는 키라라. 덤불 오솔길을 따라서 집 뒤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으로 향한다.
이렇게 키라라의 뒤를 밟았던 적은 셀 수가 없다. 키라라가 산책길에 나서서 주로 가장 처음 하는 일은 잔디밭 가장자리에 있는 낮은 나무들을 따라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탐색을 하는 일이다. 나무 사이사이의 거미줄을 훅, 훑고 지나가는 키라라에 경악을 했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어슬렁 어슬렁, 고요한 산책길에 긴장감은 보이지 않는다.
으슥한 나무 사이로만 다니는 것 같은 키라라를 큰 나무 햇살 아래에서 불러 보았다. 키라라- 몇 번 부르면, 따뜻한 햇살 사이로 반짝이는 털을 날리며 꼬리를 세우고 걸어오는 키라라. 햇살이 누부신지 가늘게 뜬 눈을 보면, 내 기분이 다 행복해진다.
그 큰 나무 옆에는 농구 코트가 있다. 농구 코트 주변은 사각의 철망으로 크게 둘러져 있는데, 철망 구석에는 아이들의 장난인지, 자그마한 구멍이 나 있다. 몸집이 작은 아이나 동물이 겨우 들어 갈만 한 구멍이다. 그 구멍 사이로 보란듯이 쏙 들어가버리는 키라라. 철망을 사이에 두고 나와 나란히 걸어간다. 내가 녀석을 따라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녀석, 매번 그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나 구멍을 빠져나온다. 그 주변에만 가면, 발코니에서 키라라를 보며 짖는 강아지에는 익숙해진 모양인지 크게 당황하는 기색도 없다.
키라라의 산책 뒤를 밟았던 많은 날 중 꽤나 자주, 다른 고양이들이 키라라를 멀찌감치 바라보다가 따라오는 것을 목격했다. 키라라처럼 이름과 주소가 적힌 칼라를 달고서 산책 나온 집고양이부터, 이 주변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까지. 키라라 뒤를 졸졸 따라오는 고양이들은 모두 키라라 보다 몸집이 작은 고양이들이다. 풍성한 털에 몸집이 큰 키라라는 이 구역의 인기묘가 되어-개인적 상상- 다른 고양이들을 매료-개인적 바람-시켰다. 특히 농구 코트 주변을 산책할 때마다 자주 보였던 하얀털의 자그마한 녀석은 참 아련하게도 키라라를 바라 보곤 했다.
낮은 나무와 덤불사이로 몸을 숨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어떤 날, 멀리서 키라라를 지켜보던 까만고양이 한 마리가 키라라에게 바짝 붙어 따라오기 시작했다. 키라라에게 거의 붙은 까만고양이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낯선 고양이를 대하는 키라라의 반응이 궁금했다. 키라라, 어쩔거니? 키라라는 낯선 고양이를 보며 하아악! 하악질을 해댄다. 위협적이다. 키라라는 고양이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다. 키라라를 따라왔던 고양이는 키라라의 하악질에 다소 움찔 했지만 공격태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하악질을 대차게 해대고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총총총 옮기는 키라라의 뒤를, 까만고양이는 포기도 않고 따라온다. 거의 집까지 따라와 키라라가 사라질 때까지 뚫어져라 바라봤다. 안쓰러운 녀석, 키라라랑 친구라도 되고 싶었던 모양인데.
우리집 아랫집도 고양이가 살았다. 회색 고양이, 삼색고양이, 창틀에 앉아 밖을 구경하는 녀석들을 자주 보았다.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키라라가 창밖을 구경하는 회색 고양이를 마주하였다. 질색을 하고 서둘러 지나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회색고양이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으려고 하는게 아닌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위협이 없을 것이라고 안심했는지 낯선 고양이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모습에, 혹시 새로운 고양이를 입양한다면, 한 동안은 문 사이나 캐리어를 사이에 두고 시간을 줘야겠구나, 생각했었다. 키라라는그 뒤로도 몇 번을 회색고양이와 창문에서 마주칠 때 마다 늘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인사를 나누곤 했다.
뜨거운 캘리포니아 날씨, 산책 나갔다가 그대로 집 주변 덤불 숲 그늘에 퍼질러 자리를 잡고 누워 낮잠을 자는 것도 봤다. 땅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기운에 배를 깔고 꿈뻑꿈뻑 조는 키라라를 보는 것도 마음이 몽글해지는 행복이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앉아 신경 쓰지 않으면 밖에 나갈 일이 없는 프리랜서 생활, 종종 키라라의 뒤를 밟으며 싱그런 잔디 냄새와 따뜻한 햇살을 만끽했던, 캘리포니아에서의 추억이 떠오르는 어느 추운 겨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