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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숲 Mar 20. 2019

라스베이거스 피자, 고수의 맛을 깨우다

화장품 맛이 난다.


고수맛을 몰랐던 시절의 맛 감상평이다. 한국에서도 종종 갔던 베트남식당, 호불호가 극명한 고수에 대해, 식당에서는 주문 시 미리 물어보곤 했다. 늘 같은 대답, 고수는 빼주세요.


고수에 대한 시장평가가 아직 덜 익었던 베트남식당 번영의 그 초창기, 호불호를 묻지 않고 쌀국수에 툭툭 올라간 고수의 첫 경험은 강렬했다. 소고기 육수의 구수한 맛을 상상했던 터라, 육수 맛을 뚫고 가장 먼저 치고 들어오는 고수의 향은 그저 맛의 방해물.


한번 잡힌 고수에 대한 강렬하고 부정적인 선입견은 쉽사리 깨기 어렵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단번에 헤쳐버릴 것 같은 맛의 무법자가 바로 고수였던 것이다. 행복한 미식의 길에 진을 빼며 무법자와 맞설 필요는 없다. 그저 맛있다, 하는 길로 편안하고 안전한 맛 로드를 즐길 뿐.


그러던 어느 날, 고수가 새로운 맛의 길을 개척하는 치트키로 떠오른 사건이 생겼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첫 여행, 피자 위에 느닷없이 올라간 고수를 만난 것이다. 휘황찬란 향락의 도시를 마주한 여행 초심자는 긴장으로 바짝 조여진 경계심으로 그 외 대부분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 터였다. 



밥때를 놓치고 배가 고프다 못해 허기진 상태로 주문한 피자에 고수가 올라갔는지 뭐가 올라갔는지 알게 뭐냐, 먹고 보자, 맛이 평소와 다르다, 모르겠다, 일단 먹고 보자. 한 조각을 먹어 치우니, 드디어 눈에 보이는 고수잎들. 어라, 맛있었는데? 


일단 나는 고수를 싫어한다고 하니, 고수를 옆으로 치웠다. 고수를 치우고 나니, 피자는 매력을 잃어버렸다. 흔하디흔한 바비큐소스 맛만 남은 피자. 슬그머니, 치웠던 고수를 피자 위에 다시 올렸다. 흐음, 이거다, 훨씬 맛있다. 고수가 맛있었던 첫 사건.



고수가 들어간 요리들.

미국은 고수의 맛에 관대하다. 마치 한국의 깻잎처럼 대중적인 향채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베트남쌀국수를 주문할 때 고수의 호불호를 묻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고수가 들어간 쌀국수를 의식 없이 먹었고, 고수의 맛을 느꼈지만 싫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이제는 고수가 빠진 쌀국수를 상상할 수 없다. 고수가 들어간 쌀국수가 맛있다고 느꼈던 날의 소소한 기쁨을 잊을 수 없다.


고수는 향긋하고 상쾌하며 깨끗한 맛이다. 미나리 향이 나는 듯도 하고, 냉이의 향이 나는 듯도 하다. 마트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고수 한 묶음을 요즘은 꼬박꼬박 사고 있다. 고수는 미국에서 굉장히 저렴한 채소에 속해 사서 먹기에도 부담이 없다. 고수가 집밥의 식재료로 자리 잡다 보니, 고수를 활용한 요리도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깻잎이 아쉬운 모든 요리에 고수를 넣고 있다.


고수를 송송 썰어 넣은 샐러드는 말할 것도 없고, 깻잎이 늘 생각났던 돼지고기 쌈채소에도 고수를 대신했다. 상추와 고수에 고기쌈을 만든 뒤로는 깻잎이 더 이상 아쉽지 않게 됐다. 월남쌈을 찍어 먹을 칠리소스에도 고수를 잘게 다져 넣는다. 달기만 했던 칠리소스 맛이 풍요로워졌다. 칼칼하게 끓인 어묵탕에도 고수 한주먹을 올리고 불을 내린다. 뜨거운 열에 숨이 죽은 고수, 그렇게 많이 넣었는데도 먹다 보면 늘 모자란다. 고수의 향긋함은 어묵탕에 새로운 감칠맛을 보여준다.


고수가 주인공인 고수전.


깻잎부침개가 생각난 날에는 불현듯 고수부침개를 만들자, 결심했다. 상상이 잘 안 되는 맛에 설레기까지 한다. 베트남식당에서 먹었던 반쎄오가 떠올라 반죽물을 가볍게 만들었다. 달걀물에 전분가루 두 수저, 후추와 소금, 설탕으로 간을 맞췄다. 우리 할머니는 파전이나 배추전을 만들 때마다 프라이팬에다가 채소를 먼저 올리고 반죽물을 휘-하니 끼얹어 주곤 했다. 고수전에는 왠지 그게 어울릴 것 같아서 그렇게 해본다. 


완성된 고수전, 모양까지 잘 잡혀 예쁘기까지 하다. 두근두근, 무슨 맛일까. 달걀물과 기름을 만난 고수는 특유의 강한 향이 살짝 떨어지고 미나리와 비슷한 향과 맛이 은은하게 남아있다. 고수 초심자에게 고수의 맛을 알려주고 싶을 때 이렇게 만들어주면 제법 성공할 확률이 높겠다 싶다. 매운고추를 썰어 넣은 새콤한 간장소스에 톡, 찍어 먹었다. 매운맛과 감칠맛이 단번에 담백한 고수전 맛의 레벨을 끌어올린다.


고수에서는 이제 화장품 맛이 나지 않는다. 어째서 화장품 맛이 났을까, 그 맛을 상상하며 먹어봐도, 조금의 단서도 찾을 수가 없으니 이것 참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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