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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숲 Mar 27. 2019

미국마트, 봄을 알리는 '슈가스냅피'


산뜻한 바람이 흐르는 계절, 살짝 추워도 무거운 외투는 집에 두고 나오고 싶어지는 계절, 봄이 왔다. 칼바람에 늘 차로 이동했던,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는 마트를 지난 주말에는 걸어가 보기로 했다.

     

변덕스럽고 새침한 계절을 종잡을 수 없어 겨울 외투를 선택했지만, 마트로 걸어가는 동안 땀이 삐질삐질 난다. 외투를 벗었더니 또 아직은 휑한 바람에 등줄기가 시리다. 감기 걸리는 것보다 더운 게 낫다 싶어 얼른 외투를 다시 껴입는다. 차로 이동할 때는 멀게 느껴졌던 거리가 햇살 한 번, 바람 한 번, 구름 한 번, 초록 잎을 새초롬하니 내기 시작하는 봄의 새싹들 한 번, 새로운 계절의 증거를 샅샅이 훑다 보니 어느새 마트에 도착이다.


주말에 구매한 제철 채소와 과일들.

     

매주 빠지지 않고 가는 식료품점 식재료 쇼핑은 일이 아니라 큰 즐거움이다. 외식은 거의 하지 않는 미국 먹생활, 마트로 가기 전 일주일 동안의 집밥 메뉴를 생각하는 것도 소소한 행복이다. 미리 준비하는 계획적인 쇼핑 리스트, 건강에 합리적인 식재료들 사이 늘 빠지지 않고 끼어 있는 정크푸드 목록을 보며 악마 같은 식탐이 이미 그날 저녁의 메뉴를 정한다.     


미국생활 4년차, 미국 마트는 아직도 나에게는 놀이공원처럼 설렌다. 한국에 살 적에도 마트는 갈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솟았더랬다.      


아이쇼핑의 즐거움을 외치는 사람들을 코웃음 치며, 자본주의 세상에서 소유할 수 없는 괴로움이 어떻게 즐겁단 말인지, 냉소를 머금었지만, 식료품점의 아이쇼핑 즐거움과 행복을 알아버린 지금은, 어쭙잖게 코웃음 쳤던 그 날의 나를 냉소한다.      


살 수 없어도 보는 것만으로도 차오르는 에너지, 좋아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며 그것을 가졌을 때의 나를 상상하는 희열, 식재료를 대하는 나의 자세다. 먹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다. 그 먹는 것을 창조하는 것을 사랑해서 그렇다. 머쓱하다.     


식재료 마트에 갈 때마다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끌고 다니는 카트를 내동댕이치고 유령처럼 걸어가 눈에 꽂힌 식재료를 탐미해버리고 말아서, 동행자의 핀잔을 한 두 번 들은 게 아니다. 제발, 카트를 마트 한복판에 세워두고 사라지지 말아줄래?          




식재료 쇼핑을 할 때마다, 정해둔 제1 철칙이 있다. 누가 뭐래도 제철 음식이 먼저다. 제철 음식은 싸고 신선하고 맛있다. 절대불변의 법칙이다. 쇼핑 리스트를 따라 식재료를 담다가도, 제철 음식을 발견하면 고민 없이 대체한다.     

생으로 그대로 먹는 슈가스냅피.


얼어붙는 겨울에도 모자람 없이 사계절이 풍족한 마트의 세계에도 봄은 온다. 지난겨울 내내 느꼈던 미묘한 맛의 결핍에도 봄이 찾아 왔다. 채소 코너, 작은 자리를 차지한 슈가스냅피가 봄을 알린다. 자, 이제부터 초록의 결핍을 채워줄 거야, 달콤한 속삭임. 응, 먹을게, 먹을 거야. 고민 없이 카트에 담는다.     


봄이 되면 마트에 나오기 시작하는 슈가스냅피(Sugar snap pea)는 미국에서 와서 처음 알게 되고 맛본 채소다. 콩깍지 채로 그대로 먹는 채소로, 생식의 매력을 알게 해준 고마운 채소기도 하다. 봄이 지나고 날이 더워지면 부드러운 식감이 억세져 마트에 막 나오기 시작할 때 많이 먹어둬야 하는 채소다.      


깨물면 아삭, 하고 씹히는 식감과 달큰한 풍미가 오이를 생각나게 한다. 그렇지만 요 슈가스냅피의 가장 매력은 무엇보다 편리함이다. 흐르는 물에 금방 씻어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도 되는 간편함이, 출출할 때 큰 고민 없이 간식으로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요즘은 식초와 소금, 설탕을 적당히 버무려 밥반찬으로 먹기도 한다.    

 

사계절 내내 구매할 수 있는 아스파라거스도 봄 제철 채소다. 봄이 되면 가격이 싸지기도 하고, 다른 때보다 밑동이 부드러워진다. 밑동 부분이 억세서 채칼로 꼭 껍질을 벗겨줘야 하는,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식재료라 자주 사지는 않지만, 봄이 되면 그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하게 된다. 대부분 가니쉬로 쓰이는 식재료지만, 나는 간장소스에 달콤짭조름하게 졸여 밥반찬으로 먹는다. 고구마줄기볶음과 식감이 비슷해진다.     


망고와 베리류도 가격이 싸지고 모양새가 멀끔해지기 시작한다. 풍미가 더 달콤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겨울철 망고는 질겅질겅 섬유질이 씹히고 단맛이 많이 빠져있다. 거의 반값으로 가격이 내리는 베리류도 달콤한 향을 더한다. 카트에 담겨서도 풍기는 달콤한 베리 향기에 침이 꼴깍 넘어간다.     


이렇게 냉장고를 가득 채운 제철음식들은 일주일 동안 매일매일 창조되는 집밥 요리의 훌륭한 식재료가 된다. 봄맛으로 꽉 들어찬 신선한 봄의 정령들이 들려주는 맛의 영감에 식탐 가득 미소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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