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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숲 Jul 23. 2019

요리, 시간을 음미한다는 것


웬만해서는 배가 아주 고플 때까지 기다렸다가 요리를 시작하지 않는다. 허기가 지기 전에 떠오르는 음식을 생각해 보고, 신중하게 메뉴를 선택하는 편이다. 너무 배가 고프면 손에 잡히는 것은 뭐든 먹게 되고, 빨리 되는 음식만 떠오른다. 이를테면 인스턴트 음식들.


라면이 소울푸드기에 인스턴트 라면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저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들이는 노력과 시간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번거롭기로 소문난 김치를 담는 것도 좋다. 알이 꽉 찬 배추를 만난 날에는 신이 난다. 미국에서는 한국에서처럼 그렇게까지 실한 배추를 만나보지는 못했다. 배추 끝에만 칼집을 내어 쩍-하고 반으로 가르는 그 순간의 경쾌함. 굵은 소금을 툭, 툭 뿌려 배추를 절이는 시간. 그 시간 동안 준비되는 배추 양념들. 풀을 쑤고 채소들을 갈아 고춧가루를 넣고, 벌겋게 배추 양념을 만든다. 양념을 잘 절여진 배추에 척, 척 묻혀 겉잎을 야무지게 말아서 김치통에 넣는다.



김치 자체의 만드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직접 담은 김치가 냉장고에서 발효되는 과정은 쾌감에 가까운 만족이다. 가끔 김치통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발효가 되는 소리를 들어보곤 한다. 갓 담은 김치는 어김없이 보쌈으로 먹고, 푹 익은 김치는 돼지고기를 숭덩숭덩 썰어 넣어 김치찌개를 끓여 먹는다.


우유에 유산균을 넣고, 온도와 시간을 지켜 발효시키는 요거트도 즐겨 먹는다. 오늘 아침에 만들면 내일 저녁에나 먹을 수 있는 요거트는 직접 만들었기에 더 깨끗한 맛이 난다.




마음이 바빠, 재빨리 요리를 하고 싶을 때는 크고 무거운 나무 도마를 꺼내지 않는다. 효율적인 사이즈에 가벼운 플라스틱 도마를 꺼낸다. 이럴 때는 요리 하는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 생각하는 맛을 내기 위해 양보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양보하고, 그럭저럭 먹을만한 음식을 만든다. 어쨌든 열과 성을 다했기에 음식은 나왔지만, 속도를 냈던 몸과 마음의 연장선으로 음식마저 휩쓸 듯 먹게 된다. 어떨 때는 음식을 하느라 지쳐버려 입맛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무 도마를 꺼낼 때는 시간 들여 요리를 하고 싶을 때다. 나무 도마 위를 조용히 춤추는 칼. 칼이 떨어지며 내는 통, 통, 통, 따뜻한 나무 소리. 맛을 내기 위해 쓸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모든 식재료를 쓴다. 재료가 많이 들어가니, 칼이 나무 위로 떨어지는 소리도 자주 듣는다.


마리네이드가 필요하면 그 전날에 하기도 한다. 마리네이드를 한 고기와 그렇지 않은 고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소스 하나를 만들기 위해 채소들을 굽고, 생강즙을 내는 과정도 설레는 일이다. 그렇다 해도 사서 쓰는 것만 못할 때도 있지만 아쉬움은 없다. 양파가 필요한 요리에는 천천히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특히나 양파는 카라멜라이징을 할수록 단맛과 감칠맛이 올라온다. 대부분의 나의 요리에서 양파는 가장 먼저 팬 위로 올라가는 식재료다.


미역국을 끓이는 시간은 대중이 없다. 미역국은 오래 끓이면 끓일수록 맛있다고 믿고, 실제로 그러하다. 오래 끓여 부드러워진 미역의 맛을 알면, 단시간에 끓여 뻣뻣한 미역은 영 탐탁지 않다. 식사하기 2시간 전에는 미역국을 끓일 준비를 하고 1시간 넘게 뭉근하게 미역국을 끓인다. 남은 미역국에는 들깻가루를 넣어 한 번 더 오래 끓인 다음, 걸쭉하고 진한 스프처럼 만들어 먹어 본다.



그래서 익숙하지도 않은 베이킹은 할 때마다 설렌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약속된 재료와 시간만 지키면 달콤하게 집안을 장악하는 따뜻한 빵과 쿠키의 향. 베이킹 이야말로 기다림의 미학이다. 오븐 속에서 빵이 부풀고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것은 모습은, 봐도 봐도 매혹적인 과정이다.


시간을 오래 쓰는 요리가 더 맛있다? 그건 아니다. 그저 요리에 온전히 시간을 쓰고 그 맛을 상상하며 창조하는, 그렇게 나온 음식에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끄덕여 보는.


음식보다 요리하는 시간을 음미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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