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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Feb 09. 2023

탄성을 이겨내며 일상 속 순례길을 걷다

작년 여름, 퇴사 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레온이라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3주 정도의 시간을 들여 산티아고까지 걷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행 비행기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산티아고에서 느꼈던 것들을 어떻게든 잊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는 이전과 다르게 변화된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직한 회사에서 정신 없이 적응하느라, 다시금 익숙해진 환경에 녹아 들어가느라, 그때의 그 마음과 인상은 자연스레 바래져갔다. 오늘 문득 책상을 보니 그 마음을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어서 이직한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올려두었던 산티아고에서 샀던 작은 기념품과 돌이 보였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원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탄성을 이기고자 한다면 어찌해야 할까 고민이 됐다.



그러다 최근에 한 책을 읽었다. 손원평 작가님의 <튜브>라는 책이었는데, 그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탄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강하게 마음 먹더라도 자신의 그 본성으로 너무나 쉽게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주인공의 삶을 통해 보게 됐기 때문이다. 그 탄성을 이기기 위해서는 꼼지락 대며 무엇이라도 해보려 발버둥칠 수밖에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이들은 우리의 산티아고 여정이 우리 각자의 나라와 자리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말하곤 했다. 나도 어렴풋하게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지만, 산티아고에 다녀온 지 반년도 넘은 지금 그 말이 너무나 더 선연하게 다가옴을 느낀다.

특별한 이유로 산티아고로 떠났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미디어에서 많이 나왔던 그곳을 막연히 가보고 싶었고, 마침 3주라는 시간이 허락되었기에 산티아고로 떠나볼까, 하며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휴학도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쉼 없이 직장을 다녔었다. 이전에 퇴사했을 때에는 코로나가 터진 시점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에 그때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조금이라도 난 이 시간을 어떻게든 의미있는 시간으로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렇게 나는 산티아고로 떠났다.

나는 사실 그곳에서 새롭게 만날 친구들을 막연히 기대했고, 내가 경험할 낯선 나라와 환경이 기대됐다. 그러나 거기서 가장 진하게 마주한 건, '나 자신'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낯선 고독과마주하면서 나는 오히려 나를 가장 진하게 마주했다.


산티아고로 가기 전까지는 온갖 소음과 복잡함 속에서 나 스스로를 돌아볼 여력도, 내가 누군지에 대한 고찰도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넘쳐나는 회사 업무 때문에 저녁이 없는 삶을 1년 넘게 살아왔고,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희미하게 지워내며 버거운 일상을 살아낼 뿐이었다. (물론 그런 나의 상태도 산티아고에서 계속 걸으며 깨닫게 됐다.)

산티아고를 걸으며 가장 자주 들었던 생각은, 그간 나는 오롯이 혼자 있으며 혼자 생각하지 못했다는 거였다. 혼자 있을 때에도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한국에서, 그리고 어떤 회사에서, 어떤 조직에서, 어떤 친구 그룹 등의 공동체에서, 그리고 가족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자유롭지 못했다. 나의 생각의 틀은 항상 익숙한 환경에 맞춰 돌아갔고, 그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아예 떨어저 '나'라는 존재에 대해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걸으면서 나는 어떤 조직의 직원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딸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친구도 아니었다.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었고 곧 산티아고라는 목적지 하나를 보고 떠날 사람에 불과했다. 그 '이방인'이라는 타이틀이 내게 가져다준 자유는 생각할 자유였다. 그리고 나는 그 자유를 기꺼이 누리며 나 자신에 대해서 마음껏 고민하고 돌아왔다.


이직 후 6개월이 지나니, 다시금 이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고, 새로운 것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의 커리어, 새로운 관계, 눈 앞에 발생한 현실의 문제들까지 모든 것이 정신 없이 흘러갔다. 산티아고에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으니, 산티아고에 다녀온지도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탄성이라는 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신없이 일상을 지내다보니 산티아고에서 마음껏 누렸던 나 자신에 대한 관찰과 그로 인해 가지고자 결심했던 삶의 태도는 쉽게 바래졌다.

일상의 산티아고를 살아낸다는 건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산티아고를 걷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테다. 나는 그 말을 몇 달이 지난 지금에야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탄성에 이겨내기 위해서. 일상의 산티아고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그때 내가 느꼈던 것들, 생각할 자유를 누리며 마주했던 생각들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어딘가에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내가 일상의 산티아고를 살아내기 위해서, 탄성을 이겨내기 위해 택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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