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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즌졍 Apr 17. 2019

어깨가 옷을 벗으라 하는 이유

[Essay] 바다와 햇살을 사랑한 대가로 어깨를 내주었다.

어려서부터 이유는 알 수 없는데 그냥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이유가 있었다. 추우면 옷을 계속 껴입으면 안 추워지는데 더울 때는 옷을 아무리 벗어도, 발가벗어도 더우니까 여름보다는 겨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핀란드에 갔다.


핀란드 가기 직전에 제주도에서 한 달을 지냈던 게 문제는 아니고 암튼 꽤나 큰 역할을 했다. 제주도에서의 한 달은 사실 끔찍했다. 나는 도망치듯 서울로 돌아왔고, 돌아와서 씻었을 때 나는 매우 더러웠으며, 온몸이 쑤실 듯이 아파 몇 날 며칠을 잠만 자느라 보냈다. 그리고 난 떠들고 다녔다. 제주도는 매우 별로였다고. 그나마 하나 좋은 걸 꼽자면, 짬짬이 바다에서 수영한 거? 그리고 또 나는 까매진 내가 어색했다. 분명 나는 까매지는 것은 상관이 없었지만, 정작 생전 처음으로 엄청나게 까매져 버리고 나자 매 순간 어색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제주도에서의 한 달은 사실 끔찍했다.
그나마 하나 좋은 걸 꼽자면, 짬짬이 바다에서 수영한 거?


핀란드는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일기예보를 봐도 서울이 이상기후로 핀란드보다 추운 날이 더 많았고, 그 겨울 딱 한 번 마이너스 30도까지 갔었는데, 그때 나는 엄마와 엄마의 친구들과 헬싱키 바깥을 돌아뎅기고 있었다. 근데도 별로 그렇게 추운지 몰랐다. 춥긴 추웠지만. 다만 핀란드의 겨울은 길었다. 너무 빨리 시작했고,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서울에서는 미세먼지 속에 벚꽃이 만개해 내 페이스북과 인스타 타임라인에 꽃잎을 흩뿌리고 있었는데, 핀란드에는 눈이 왔다. 5월에.


긴 겨울은 더 긴 시간 동안 코트와 롱부츠를 신게 했고, 코트와 롱부츠는 무겁고 답답했다. 물론 사우나가 있었기 때문에 겨울에도 비키니를 입고 호수에 뛰어들 수 있었지만, 추웠다. 그리고 나는 너무 그리웠다. 별로라 소문내고 다녔던 제주도의 바다가. 여름날의 바다가. 바닷속에 누워 바라보았던 뜨겁고 따뜻하고 눈 부신 햇살이. 그 무엇보다 화려하고 요란하게 출렁이던 바닷속 햇살이. 너무 그리웠다. 그래서 계획을 짰다. 나는 계획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멍청이였기 때문에. 그리고 내 머리는 상상하는 순간 순식간에 계획을 짜겠다고 자동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코트와 롱부츠는 무겁고 답답했다.
화려하고 요란하게 출렁이던 바닷속 햇살이.
너무 그리웠다.


썸머잡이고 나발이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지금 이때가 아니면 평생 가기 어렵다는 계산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그 이후 한 달 정도 그렇게 이쁘고 좋다는 스페인 바닷가란 바닷가는 전부 다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갈 때는 지금 아니면 또 못 탈 거 같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차고 둥기둥기 집에 가야겠다는 계획이 꽤나 빨리 딱딱 정리됐다. 돈도 없고 이젠 슬슬 서울도 그리우니 2 달이면 아주 길고 서울 가고 싶은 생각에 안달복달 날만큼 충분하다 생각했다.


까만 장갑을 끼거나, 팔뚝 중간에 반팔 선이 생기는 건 싫으니까, 산티아고 순례길은 얇은 난방과 쫄쫄이 스포츠 레깅스를 입고 걸었다. 까매지는 건 순례길 다 걷고 한 달 내내 스페인 바다에서 수영할 때, 그때 비키니 입고 구석구석 까매지면 되었다.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한다. 나는 인간이고. 그래서 맨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머리도 좀 나쁜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야, 아, 나 옛날에도 같은 실수를 저질러 버리곤 했지. 깨닫는다. 그래도 깨닫는 게 어딘가.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한다.
나는 인간이고.


나는 며칠 전 보라카이에 다녀왔고, 첫날 4시간 수영하자마자 피부가 빨갛게 부풀어 올랐고, 다음날 뒤늦게 선크림을 바른 채 다시 4시간 수영했고, 그다음 날 아침까지 얼음 세 통을 전부 다 녹여가며 찜질을 했다. 마지막 날 루프탑에 있는 수영장에서 밤에 수영했으나, 서울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 얼굴은 빨갛고 까맣고 주름지고 허옇게 벗겨져 흉하고 못생겼고 아팠다. 물론 어깨도 아팠다. 왜 모든 가방은 어깨를 짓누르도록 디자인된 걸까. 왜 모든 옷은 어깨 위에 얹히게 디자인된 걸까. 어깨가 진짜 쓰리고 너무 아팠다. 지금도 아프다. 젠장.


여름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정말 미치도록 빙수와 바다가 그립게 만든다. 배낭이고 워킹화고 나발이고 그냥 이대로 뭐든 좋으니 아무거나 차가운데에 나를 집어던지고 싶게 한다. 내가 28일 동안 800km를 걷게 만든 동력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하겠다. 이 길의 끝에 존재하는 차가운 바다라고. 근데 정작 산티아고에는 바다 없다. 100km 더 걸으면 피에스타라는 곳이 나오지만, 그 바다에 뛰어드는 건… 뭐… 일단 나는 별로.


왜 모든 가방은 어깨를 짓누르도록 디자인된 걸까.
왜 모든 옷은 어깨 위에 얹히게 디자인된 걸까. 


산티아고에 도착하자마자 구글맵을 켜서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을 찾았고, 놀랍게도 샌프란시스코라는 마을이자 해변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해변 바로 앞에 ★ 이 별 말고 * 뭔가 대충 이런 별이 세 개 있는. 내가 보기엔 그냥 호텔 이름에 자체적으로 넣은 거 같긴 하지만 암튼. 그런 호텔이 있었다. 그래서 예약했고, 다음날 바로 버스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내가 원했던 차가운 바다가 진짜 거기 있었다. 진짜 차가운 바다. 목욕탕 냉탕만큼 찬 바다. 한여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만큼 차가운 바다. 그래서 수영을 못했다. 추워서. 그리고 파도에 싸대기 맞고 쓰러져 발목도 나가서. 수영 못했다. 핀란드에서 산 진주 귀걸이만 잃어버리고. 쒸익쒸익. 대신에 그 해변에 있는 수많은 백인처럼 수건 한 장 깔고 뜨거운 모래사장에 누워 따땃한 스페인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잤다. 뒤집어서 한 번 더 잤다. 그리고 이틀 동안 아파서 발가벗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가마니처럼 가만히…


진짜 차가운 바다.
목욕탕 냉탕만큼 찬 바다.
한여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만큼 차가운 바다.


암튼 그래서 난 지금 어깨가 아프고. 쓰리고. 따갑고. 근데 아직도 못 벗겨낸 피부 껍질이 더럽게 더덕더덕 붙어있고. 이걸 어느 세월에 다 떼나. 언제 안 아파지나 걱정되지만. 뭐 맨날 씻으면 언젠간 다 벗겨지고 안 아파지는 날이 오겠지… 힝. 이젠 좀 그만해야지… 아파…


[유튜브] 어깨가 옷을 벗으라 하는 이유에서 본 글을 동영상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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