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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Sep 08.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45-신암행어사 리뷰11.화랑 원술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던 원술의 마지막 소원

니체 전집 번역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다수 인용 및 필사함.







일곱 개의 봉인 (또는 “그렇다”와 “아멘”의 노래) 379p 1 2

 

1.

내가 예언자이고 그리하여 두 바다 사이에 놓여 있는 높은 산등성 위를 떠돌고,

후텁지근한 저지대와 지친 나머지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모든 것에 적의를 품으면서 과거와 미래 사이를 먹구름처럼 떠도는, 저 예언자적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면,


 어두운 가슴속에서 번개를 내려치고 구원의 빛살을 던질 태세를 하고 있다면, "그렇다"  라고 시인하고 "그렇다!" 라고 웃어주는 번개를 잉태한 채, 예언자적 번갯불을 내려칠 태세를 하고 있다면.

이같이 배불러 있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 그리고 진정, 언젠가 미래의 불을 밝혀야 할 자는 오랫동안 무거운 폭풍우가 되어 산 위에 걸쳐 있어야 하리라!

오, 나 어찌 영원을, 반지 가운데서 결혼 반지 회귀의 반지를 열망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내 아이들을 낳아줄 만한 여인을 나 이제껏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인 말고는.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2.

일찍이 나의 분노가 무덤들을 파헤치고 경계석을 옮기고 낡은 서판들을 부숴 가파른 나락으로 굴려 떨어뜨렸더라면,

일찍이 나의 경멸 어린 웃음이 곰팡이 낀 고루한 말들을 불어 날려 보내고, 나 빗자루가 되어 십자거미들에게 다가갔다면, 그리고 말끔히 쓸어내는 바람이 되어 낡고 음습한 묘혈들을 찾아들었다면,

내 일찍이 옛 신들이 묻혀 있는 곳, 세계를 중상한 옛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를 곁에 두고는 세계를 축복하고, 사랑하며,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앉아 있었다면.

부서진 지붕 사이로 하늘이 티없는 눈길로 내려다보기만 해도 나 교회와 신의 무덤까지도 마에 들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풀과 빨간 양귀비가 그리하듯이 폐허가 된 교회에 즐겨 앉는다.

오, 나 어찌 영원을, 반지 가운데서 결혼 반지,저 회귀의 반지를 열망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내 아이들을 낳아줄 만한 여인을 나 이제껏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인 말고는.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













/








인간이라는 한계을 넘어서려면 차라투스트라라고 해도 당연히 그냥저냥 숨만 쉬는 듯 적당히 살아서는 가능할 리가 없다. 삶과 죽음이라는 두 바다 사이에 놓인 산등성이에서 지친 나머지 죽을수도 살 수도 없는 모든 것에 적의를 품는 태세에 놓여서도 번갯불을 내려칠 준비가 되어야만 가능하리라. 이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서 한국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리는 최승자가 누구나 인생의 고비인 서른 살에 대해서 이렇게 벼락같이 내려치는 미친 절창의 시를 노래한 바 있다. 이 시 하나만으로도 최승자 그녀는 니체에 못지 않은 시인이리라.




 

그렇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라고 시인은 대놓고 우리들을 비꼰다. 너희들이 행복이라 말하는 것은 항복이 아니냐고? 우리 다같이 철판깔고 행복을 위해선 인격이든 몸과 마음이든 모든 걸 다 바치고 항복하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심지어 이 시집의 제목부터 이 시대의 사랑. 1989년에 발간되었지만 결코 지금도 최승자의 시대에서 우리들의 사랑이 더 나아갔다고 쉽게 말하긴 어려우리라.


허나 이렇게 살기도 죽기도 어려운 경계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니체와 최승자는 바로 이런 지점을 주목했던 게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기쁨과 생명을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고통과 죽음을 멀리 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인생이며 운명이라고 인정하고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마침내 니체의 표현처럼 미래를 임신하고 번갯불을 가득 품고서 볍게 출 수 있으리라




이런 생과 사의 경계에서 머무르면서 스스로 더 강해지려는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며 극심한 고통과 비탄에도 불구하고 결코 스스로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아 황하는 인물로는 신암행어사의 화랑 원술 이상의 캐릭터를 떠올리기 힘들다. 그는 한때 대장군 문수의 부하로서 대전쟁을 겪다가 악수 쾌타천을 베었으나, 아지태의 엄청난 힘으로 쥬신이 하루아침에 멸망하자 쥬신의 군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이 허무해지고 목적없는 삶에 절망하여 아지태의 부하가 되었다.




그후 원술은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온 문수의 산도에게 찰나의 흔들림으로 패배하고 죽었으나, 아지태의 재미삼아 한 장난질로 다시 죽지도 못하는 저주를 받아 몸이 반으로 잘려도 살아있는 좀비같은 상태로 부활했다. 허나 그렇다고 다시 아지태의 조종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동경하는 문수 장군을 따라다닌다. 생명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마저 우롱하는 아지태를 이길 수 있는 자는 결국 문수 뿐이기. 그렇게 때론 문수를 돕고 때론 아지태를 방해하다가 또한번 아지태에게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자신이 이전에 악수와의 전쟁에 죽였던 쾌타천에게 붙잡힌 원술. 이미 좀비가 된 이후로 인간적인 존엄은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이전에 자신이 목을 친 상대에게 붙잡혀서 장난감 취급당하는 고문은 그 어떤 생명체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리라. 그럼에도 원술은 절대로 아지태에게다시는 편해지기 위해서 굴복하지 않는다. 자신의 우상 문수 장군이 했듯이 자연의 섭리, 대지의 율법을 따르고 태양을 떳떳이 다보는 삶만이 유일하게 가치있는 삶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리하여 말없는 장난감처럼 아무리 괴롭혀도 반응이 없는 원술을 악수들의 모체 쾌타천은 괴롭히다가 질렸는지 마치 거대하고 괴상한 악수의 형체로 만들어 문수 진으로 보낸다.



처음에 문수는 당연히 자기가 모르는 아지태의 새로운 거대 악수가 쳐들어온 줄 알았으나, 직접 부딪치는 도중에 뭔가 이상함을 느끼다가 이것이 악수가 아니라 바로 원술임을 깨닫는다. 당연히 이것도 아지태의 장난임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분노하지만 자신이 이미 산도를 통해 한번 죽인 적 있는 원술을 또 한번 죽여야 하는지 문수는 고민에 빠진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문수에게 원술은 말은 하지 못하지만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바로 이제는 문수에게 자신을 완전히 끝내달라는 원술의 간절한 부탁이 담긴 눈빛... 그러나 이는 단순히 원술이 생이 지치고 고통이 힘들어서가 아닐 것이다. 원술은 사실 항상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많이 가진 문수 장군을 부러워했으나 자신은 문수 장군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때 아지태를 섬기기도 하는 등 마치 차라투스트라가 온갖 곳을 여행하듯 많은 방황을 했지만 이제는 문수 장군처럼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 자신의 생각한 최선의 길이라고 정한 것이다.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그저 아지태의 장난감이자 꼭두각시 노릇 외엔 아무것도 아니기에. 선과 악의 경계를 스스로 정하는 문수처럼 원술은 생과 사의 경계를 스스로 정하고, 지금처럼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상태를 끝내고 죽음이라는 자연의 순환을 따르기로. 이를 이해한 문수는 포병들에게 무기고를 조준하여 원술과 함께 화약들을 폭발시키고.


이제 원술은 하나의 꿈을 꾼다.





이전에 좀비로 부활한 원술이 다시 문수를 찾아오자, 문수는 썩어가는 원술의 몸에서 피고름으로 냄새가 나자 처음엔 꺼려했지만 원술이 문수 자신이 이전에 서양에서 쥬신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붕대를 감아줬다는 것을 상기시키자 직접 원술의 몸에 붕대를 감아준다. 어쩌면 만다라케 침을 맞았던 문수가 행복한 과거를 찾아 헤맸듯이, 원술과 과거의 기억 중에 행복한 기억으로 문수와의 이 추억을 다시 떠올렸을지도. 그리고 이 꿈같은 화상 속에서 다시 한번 원술은 꿈속의 꿈을 꾼다. 행복한 과거 속에서 안식을...


쥬신 최고의 검 화랑 원술. 이제 편히 잠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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