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포쟁이 뚱냥조커 Sep 09.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46-신암행어사 리뷰12 주사위철학

신들과 창조의 웃음을 걸고서 주사위놀이 한판


 
일곱 개의 봉인 (또는 “그렇다”와 “아멘”의 노래) 379p

 1 2 3

1.

내가 예언자이고 그리하여 두 바다 사이에 놓여 있는 높은 산등성 위를 떠도는,

후텁지근한 저지대와 지친 나머지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태세를 하고 있다면, 그렇다! 라고 시인하고 그렇다! 라고 웃어주는 번개를 잉태한 채, 예언자적 번갯불을 내려칠 태세를 하고 있다면.

이같이 배불러 있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 그리고 진정, 언젠가 미래의 불을 밝혀야 할 자는 오랫동안 무거운 폭풍우가 되어 산위에 걸쳐 있어야 하리라!

오, 나 어찌 영원을, 반지 가운데서 혼인반지를, 저 회귀의 반지를 탐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내 아이들을 낳아줄 만한 여인을 나 이제껏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인 말고는.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2.

일찍이 나의 분노가 무덤들을 파헤치고 경계석들을 옮기고 낡은 서판들을 부숴 가파른 나락으로 굴려 떨어뜨렸더라면,

일찍이 나의 경멸어린 웃음이 곰팡이 낀 고루한 말들을 불어 날려 보내고, 나 빗자루가 되어 십자거미들에게 다가갔다면, 그리고 말끔히 쓸어내는 바람이 되어 낡고 음습한 묘혈들을 찾아들었다면,

내 일찍이 옛 신들이 묻혀 있는 곳, 세계를 중상한 옛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를 곁에 두고는 세계를 축복하고, 사랑하며,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앉아 있었다면.

부서진 지붕 사이로 하늘이 티없는 눈길로 내려다보기만 해도 나 교회와 신의 무덤까지도 마른에 들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풀과 빨간 양귀비가 그리하듯이 부서진 교회에 즐겨 앉는다.

오, 나 어찌 영원을, 반지 가운데서 혼인반지를,저 회귀의 반지를 탐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내 아이들을 낳아줄 만한 여인을 나 이제껏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인 말고는.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3.

일찍이 창조의 힘을 지닌 숨결로부터, 그리고 아직도 우연이라는 것들을 강제하여 별의 윤무를 추도록 하는 저 천상의 곤궁으로부터 한 줄기 숨결이 내게 다가왔다면,

나 일찍이, 행위의 긴 뇌성이 투덜투덜하면서도 고분고분 뒤따르고 있는, 저 창조의 힘을 지닌 번개의 웃음으로 일찍이 웃어보았다면,

나 일찍이 이 대지, 신들의 탁자에 앉아 대지가 요동치고 터져 불길을 토하도록 신들과 주사위놀이를 벌여보았다면,

이 대지가 신들의 탁자이고, 창조의 힘을 지닌 새로운 말과 신들의 주사위놀이로 인해 떨고 있기 때문이다.

오, 나 어찌 영원을, 반지 가운데서 혼인반지를, 저 회귀의 반지를 탐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내 아이들을 낳아줄 만한 여인을 나 이제껏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인 말고는.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









우리는 종종 인생을 살다가 자신의 운을 탓한다. 행운이 올때 기뻐하고 불운하다 생각할땐 슬퍼하며 그리고 구나 더 많은 운을 원한다. 물론 행운의 여신은 절대로 내가 필요할 때 나를 위해 웃어주지 않는다. 이런 우연성이라는 요소는 그래서 항상 불안정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성과 보편성, 필연을 중시하는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도 옛부터 배격해야 할 것으로, 심지어 악이라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선과 악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뒤집고 그 사이에 놓여있는 경계석을 부숴버리며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기치아래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는 니체에게는 이런 우연이라는 불안정한 가치도 결코 단순히 악이라던가, 필연보다 열등한 가치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니체는 우연이야말로 창조의 힘을 가진 숨결이며 번개의 웃음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니체를 계승하는 철학자 중 하나인 들뢰즈도 이런 우연의 철학을 높이 평가했으며, 원제는 니체와 철학 이지만 번역자 분이 우연성에 대한 부분을 중요히 여겨서 니체, 철학의 주사위 라는 이름으로 예전에 번역된 저서도 존재할 정도. 우연성에 대한 긍정, 결과가 아닌 주사위 던지기 그 자체에 대한 위대한 긍정은 분명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가능성을 잉태한다.



게다가 이런 창조의 힘을 가진 번개의 웃음을 가지고 니체는 대지를 탁자삼아 불길을 토하도록 신들과 주사위놀이를 벌여보겠다고 한다. 물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작품 내내 반복되는 것처럼 니체의 세계에서 이미 신은 죽었다.  초라하고 왜소해진 인간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다가 그 연민을 이기지 못하고 그 초월적인 신은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숭배했던 기독교의 여호와 같은 유일무이하고 전지전능한 인격신은 죽었다고 한다면, 니체는 이제 유일신이 없다면 모두가 신이 될 수 있는, 아니 이미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들로 가득찬 세계가 아니겠냐고 역설한다. 물론 이 신은 초월적인, 우주의 조물주 같은 신이 아니라 아주 작더라도 바로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힘으로 웃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신들이리라. 바로 그 수많은 신들과 우연이라는 힘을 가지고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보겠노라고, 니체는 누구보다 크게 웃는 게 아닐까. 신암해어사의 문수도 바로 이런 마음으로 아지태와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를 벌이려고 한다.




누구보다 많은 전장을 같이 헤쳐나온 화랑 원술을 자기 손으로 두 번 장사지내고, 문수는 이제 진지하게 아지태와의 전쟁에 임한다. 자연의 섭리를 농락하고 인간의 존엄을 우습게 아는 저 아지태를 이미 한번 악수들에게서 세상을 지켜낸 우리 영웅들이라면 다시 한번 아지태도 이겨 수 있다고 쥬신의 대장군 시절처럼 외친다. 그런데 이제 약속한 날인 일식이 일어나자 갑자기 문수는 전쟁도구인 칼과 총을 더 챙기는 것이 아니라 황당하게도 작은 육면체 두 개를 손에 쥔다. 이전에 원술에게 멋진 장면을 보여주겠다고 한 말을 다시 읊조리며...



문수는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이 급박한 아지태와의 전쟁에서 갑자기 죽은 원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도박판을 벌이는 것일까? 물론 당연히 그럴리는 없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우연성 안에는 위대한 창조의 힘이 있다. 내버려둔 썩은 곡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술의 발명부터 처음엔 신약의 부작용으로 생각했다는 정력강화제까지, 인류의 얼마나 많은 창조적 발명들이 우연에서부터 시작되었던가. 그러면 아지태와의 싸움은 단순히 정공법으론 너무나 전력 차이가 많이 나서 당연히 승산이 없기에 문수는 이렇게 다소 무모해보이는 우연적인 병법을 시험해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아무리 우연의 창조적인 가능성을 믿어본다 해도 문수는 조금 지나쳐 보인다. 한창 전투 중인데 영실에게 내기를 좋아하냐고 묻는가 하면, 문수가 설명하는 내기의 방식은 아무리 봐도 카지노같은 도박장에서 하는 도박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문수는 주사위를 던지고 주사위에 나온 그대로 부대들에게 명령을 내려버린다. 심지어 아직 전투를 시작하지도 않은 후위 부대에 주사위대로 퇴각 명령을 내린다.



당연히 명령을 받은 부대들은 대혼란에 빠진다. 아직 전투를 시작하지도 읺은 후위 부대를 퇴각하라 명령하고 전투부대가 아닌 보급부대를 최전선으로 보내버리니 당연히 군대의 진형은 엉망이 된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이미 이전에 한번 악수들과의 전쟁에서 쥬신을 구해내서 '전설' 칭호를 받은 문수 장군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엉터리같아 보이는 그의 명령을 한순간에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전장에서도 제대로 수행한다. 실로 병사들이 문수를 믿고 문수도 병사들을 믿지 못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작전이리라.



이에 대해 영실이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문수에게 따지지만 문수는 태평하게도 두 주사위가 즉석에서 운명을 결정해주고 있다고 답할 뿐이다. 이쯤되면 즉석에서 사령관 문수에 대한 집단 반발이 나오거나 심지어 프레깅, 상관 살해 행위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실제 현실에도 베트남-미국 전 미국 장교들의 전사 사유 중 상당수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지시하는 장교를 부하 병사들이 살해했다는 불행한 기록도 존재한다. 아무리 전설 경으로 칭송받는 문수라 하더라도 이런 상관 살해를 당할수도 있는 미친 주사위에 의존하는 병법을 왜 저지르는 것일까? ... 그건 바로 사람의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까지 지닌 신같은 아지태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아지태는 사람의 마음 속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며 심지어 가까운 미래에 무엇을 할지조차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문수가 주사위를 던지기 이전에 군대에게 좌측 성벽으로 진군하라 명령하자 곧바로 그걸 캐치하고 성벽에 악수들 병력을 집중시키는 무시무시한 전술이 가능한 것이다. 말 한마디 눈빛 한번에 생명을 사라지게 하는 힘이 아니더라도 이것만 해도 아지태는 이미 인간을 초월하여 신적인 권능에 가까이 와 있다. 바로 그렇기에 문수는 이런 아지태의 신적인 능력의 허점을 찌르기 위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오히려 주사위의 우연에 운명을 맡겨버린다.


 허영만 화백의 도박만화 타짜 4부에서도 이와같 박과 신에 대해서 짧게 논한 적이 있다. 양자역학의 아버지 하이젠베르그는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은 이제 뉴턴 역학 시절처럼 정확한 값을 가지는 게 아니라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다고 양자역학 이론을 주장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반박했다. 즉 이 우주 만물은 무슨 주사위마냥 확률적으로 우연적으로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정한 우주의 필연적 법칙대로 조화롭게 돌아간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 타짜의 주인공은 이런 필연의 신을 믿지 않고 우연의 악마, 파리대왕 벨제붑을 믿는다. 그리하여 신의 필연을 당황시키고 결국엔 도박서 승리한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을 우습게 보고 다 자기 손바닥 안이라 여겼던 아지태도 문수의 이런 주사위놀음에 크게 당황한다. 애초에 인간 대 악수의 병력 차이도 그렇고 성을 수비한다는 유리한 포지션도 그렇고 혼자서 백만 외적을 상대했다는 전설적인 무사 배중손같은 지원군의 차이 등등 누가봐도 엄청나게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를 가지고 시작했던 아지태. 그런 아지태인데도 난적 문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사위 던지기라는 우연에 맡기는 전략을 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인간 대 악수라는 이 전장은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웅크려있던 상처받은 야수, 산도 춘향도 이제 다시 눈을 뜬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45-신암행어사 리뷰11.화랑 원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