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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n 14. 2019

회상일기 190613 난 왜 굳이 철학을 읽고 쓸까?

반백수의 최신 일기. 조커의 근황


 나에게 있어 글쓰기란 창작이란 뭘까. 우연찮게도 어제는 자주 가는 도서관에서 글쓰기 강연이 열리길래 강의를 들었다. 강의자 분은 공교롭게도 브런치에서도 많은 구독자를 가진 작가분이었다. 처음에 시작부터 사람들이 글쓰기는 안하고, 글쓰기 강연만 들으러 다니고 글쓰기 책만 자꾸 산다고 하셔서 왠지 재미있게 혼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혼자 생각나는 대로 줄줄 써보는 줄글과, 고치고 정리해서 남에게 읽힐 초고를 따로 구분하라는 이야기는 확실히 글을 처음 써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글을 쓰는데 익숙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도 다시 한번 상기할 만한 조언이었다. 중간중간 자료의 맞춤법에 사소한 오류가 보이거나 쉬운 문장이 무조건 좋은 문장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취지에선 약간 고개가 갸웃거렸지만, 기본에 충실하자는 그런 강연이라고 생각하니 분명 배울만한 점이 있는 좋은 강연을 들었다. 문학과 철학을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는 쉬운 문장만이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해버리면 언어유희같은 언어의 다의성과 풍부성을 놓쳐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또 공교롭게도 그날 밤 한 독서모임 단톡방에서 나에게 독서란 무엇인지, 철학을 왜 공부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들었다. 


 글쎄, 일단은 첫번째로 독서는 재미있다. 특히 철학책은 어려운 만큼 재미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것을 주로 게임에 비유한다. 슈퍼마리오 1탄은 분명 재미있는 게임이고 게임계의 고전이지만, 몇십년동안 이것만 하면 누구든 질리고 재미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난이도 있는 게임을 즐기다가 문명이나 다크 소울같은 흉악한 난이도의 게임도 도전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책 중에서는 만화같이 가볍고 재밌는 책도 있지만, 점점 쉬운 책은 재미가 덜하게 느껴지고 좀 더 복잡하고 어려운 책을 이해하게 되면 (공자님 풍으로)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물론 여기에는 나의 지적 허영도 포함되어 있다.  예전 나의 20대 시절엔 나의 지적 허영에 대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이건 정말 스스로에게 사기 치는건 아닐까 하고 많이 불안해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다른 도서관 강연에서, 방송작가를 하시는 분께 이 질문을 드리자 자의식 과잉과 지적 허영이 아니면 글이라는 것 자체가 나오기 어렵지 않냐고, 자신도 그래서 프로이트니 라캉이니 지젝이니 열심히 공부했고 그걸 자양분으로 삼아 학생분도 열심히 쓰면 된다고 말씀해주시니 뭔가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치유받는 기분이었다. 마치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브루스 배너가 헐크를 이전엔 자기 안의 질병으로 생각했지만 치료제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것처럼.


 두번째 이유로는 작가들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꼭 글을 쓰는 작가만이 아니라 미술, 음악, 게임 디자이너 등등 무언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방금 전 말한 나의 지적 허영과도 연관이 된다. 첫번째 이유가 주로 재미와 연관된 이유라면 두번째로 작가가 멋있다는 건 의미와 관련된 이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나에게 어릴 적 최초의 의미있는 글은 판타지소설 1세대인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였던 것 같다. 최근에 또 소설 발매 후 20년이 지났는데도 드래곤 라자 이름으로 모바일 게임도 나올 정도이니 이는 절대 나 혼자만의 감상이 아니라 내 또래 세대의 시대정서라고 표현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는 단수가 아니다' 같은 철학적 함의를 품은 명대사는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이런 소설들이 철학 공부가 아니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나서 나는 부족하더라도 철학사부터 하나씩 입문서를 읽어보기 시작헀다. 다행히 요즘 나오는 처음 읽는 현대 독일 철학사 같은 시리즈는 예전보다 입문자를 많이 배려한 친절한 글이라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철학에 관심있는 다른 분들께도 추천을 드리는 책이다.


 세번째 마지막으로 좋은 책을 쓰는 것이 어릴적부터 나의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회상일기 첫번째 글에서 언급한 만화 원피스의 닥터 히루루크의 명대사처럼,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잊혀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죽음이 무섭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생명이란 불가능하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신체의 고통에 굉장히 취약했고 누구나 죽는다는 현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영원불멸은 아니더라도 누군가 내 육체가 흔적도 없어져도 나를 기억해주는 방법이 존재할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 인류가 가족을 만들고 자손을 낳는 것은 이런 죽음에 대항하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가족에 대해서 별로 기대하는 바가 없고, 그래서 더더욱 그나마 할 줄 아는 방식인 글쓰기에 의존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만약 중학생 때의 장래희망인 만화가라는 꿈을 계속 밀어부쳤다면 지금 웹툰의 시대에 어떻게 데뷔하려고 발버둥치는 무명의 만화가 중 한명이었을 것이다. 또는 대학에 첫 입학한 새내기 시절때 기대한 대로 락 밴드에 들어가서 기타나 드럼을 쳤다면 부족하나마 음악가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지금 내 방의 기타는 여전히 먼지만 쌓이는 중이고, 중학생때 혼자 졸라맨 풍 만화를 그리던 똥손은 여전히 진화하지 못해서 비극이자 희극의 주인공으로 남아있다.   


 재미있어서 즐겁고, 의미있어서 멋있고, 죽음을 넘어 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삼위일체의 실행론이 글쓰기라고 정리해서 포장해보니 오글오글한 중2병이 깃들어있지만 나름 괜찮은 정리같기도 하다. 강연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읽기만 하고 기록 정리하지 않으면 결국 나의 생각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 내가 진짜 책을 내고 그 책이 수백년 수천년 지나도 사람들이 찾는 이른바 고전이 될 수도 있을까. 철학자 스피노자는 윤리학(에티카) 4부에서 명예욕이야말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다. 명예욕에 대해서 비판하는 작가조차도 그 책에 자신의 이름을 써놓는다고 담담히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나의 근본적인 욕망에 충실해서 도박을 걸어 보는 것도 실로 흥미로운 인생 아닐까. 그래서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매일 브런치에 짧막하게나마 글을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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