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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Oct 12. 2020

한글날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면...feat독수리오형제

오래 미뤄둔 진짜 덕질의 첫 걸음


 어쩌다보니 친구따라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오늘은 한글날이었다. 왜 일본어 공부를 서른 넘어서 이제야 히라가나부터 배우게 되었을까. 이 이야기는 아마 독수리 오형제부터 시작해야 되려나.




 중학생 부터였을까. 아니다 초등학생 때부터다. 독수리 오형제 나의 어릴적 첫 우상이었고 아이돌이었고 덕질의 대상이었다. 아직 집에 내 개인 컴퓨터도 드물던 시절 티비에서 하는 만화는 거의 유일한 즐길거리였다. 그래서 운동회하면 전교 꼴찌를 다투던 나조차도 독수리 오형제의 본방 사수를 위해 늦기전에 집에 가서 숙제를 끝내버리고 티비앞에서 두근거리던 유년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중학생이 될 무렵에 독수리 오형제가 사실은 일본산 애니고 원 제목이 과학닌자대라는 소식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분명히 다 한국 이름들로 나오고 한국말하는 만화영화였는데 이게 일본산이었다니?! 그럴리가 없어! 라고 사춘기의 나는 한달쯤 현실부정에 시달렸지만 한달쯤 후에는 그냥 체념하고 이제는 안 보는 만화니까 하고 현실을 수긍했던 것 같다. 그러나...




 중학생때 2차 성징이 한창일 무렵 다들 집에서 몰래 보고 학교에서는 남자가 무슨 그런 여자애들 만화를 보냐!! 라고 시치미를 뚝 떼었던 그 전설의 그 만화. 카드캡터 체리가 사실은 일본만화 카드캡터 사쿠라 라는 두번째 충격을 알게되자 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삐뚤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껍데기와 알맹이가 다를 수 있음을, 철학적으로 있는 척 말해보자면 표층과 심층의 심대한 차이에 대해 크나큰 회의에 빠진 시절이 중 2였던 셈이다.




 그리고 중2병을 넘어 대입에 대해 고민을 시작한 중3의 말엽, 나는 에반게리온을 만났고 거대한 로봇 액션과 세기말 신지의 내적 갈등에 공감하고 매료되어 고등학생 시절을 내내 덕질하는 친구들과 보냈다. 페이트나 원피스 등등 또다른 대작들과도 만났지만 앞의 세가지에 비하면 분명 그것들의 영향은 부차적이었다. 그리고 이쯤되면 자연스럽게 고등학교의 제2외국어 선택에서 일본어를 배웠을 만도 한데... 그 시절 나는 왠지 또 삐뚤어진 마음으로 일본어가 아닌 중국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다.


 그 당시 이유는 두 가지. 일본어 선택자가 내 학교에서 내가 극혐하던 왕따 학폭 가해자를 비롯해 80퍼가 선택한 주류였다는 점. 그리고 일본어를 아에 배워버리면 이전의 나처럼 이제 일본 만화 애니를 신비하게 숭상하듯 볼 수가 없어질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신비라는 것은 모르기에 존재하니까. 알면 알 수록 신비의 베일은 벗겨지기 마련이라고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10대의 나에게 일본 서브컬쳐는 내 무의식과 영혼을 의탁해두던 일종의 안식처, 종교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20대에 들어서는 대학을 다니고 더 넓고 다양한 세상과 사람을 겪는중에 이제 일본산 서브컬쳐의 울타리에서 자연스레 벗어나게 되었고, 덴마나 죽음에 관하여 같이 명작 한국 웹툰에 친숙해지면서 굳이 일본어를 공부할 필요성도 해소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브컬쳐 자체와 아주 멀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이 아니어도 이제 안식의 시공간을 여러곳 알게 되었을 뿐. 그런데 어쩌면 이제 충분한 거리감이 생겼기에, 좀더 진지한 마음으로 일본어를 천천히 공부해도 되는 게 아닐까. 일본으로 여행가고 싶다며 같이 일본어 공부하자는 친구의 권유는 이런 내 마음에 적절한 방아쇠가 되어 불을 당겼다.


계속...




독수리 오형제 / 권혁웅

 

0. 기지

정복이네는 우리 집보다 해발 30미터가 더 높은 곳에 살았다 조그만 둥지에서 4남1녀가 엄마와 눈 없는 곰들과 살았다 곰들에게 눈알을 붙여주면서 바글바글 살았다 가끔 수금하러 아버지가 다녀갔다

 

1.독수리

큰형이 눈뜬 곰들을 다 잡아먹었다 혼자 대학을 나온형은 졸업하자마자 둥지를 떠나 고시원에 들어갔다 형은 작은 집을 나와서 더 작은 집에 들어갔다 그렇게 십년을 보냈다 새끼 곰들이 다 클만한 세월이었다

 

2.콘돌

둘째형은 이름난 싸움꾼이었다 십대일로 싸워 이겼다는 무용담이 어깨 위에서 별처럼 반짝이곤 했다 형은 곰들이 눈을 뜨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둘째형이 큰집에 살러 가느라 집을 비우면 작은집에서 살던 아버지가 찾아왔다

 

3.백조

누나는 자주 엄마에게 대들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곰같이 살아! 나는 그렇게 안 살아! 눈알을 박아넣는 엄마손이 가늘게 떨렷다 누나 손은 미싱을 돌리기에는 너무 우아했다 누나는 술잔을 집었다

 

4. 제비

정복이는 꼬마 웨이터였다 누나와 이름 모르는 아저씨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소식을 주워 날랐다 봄날은 오지 않고 박꽃도 피지 않았으며 곰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그냥, 정복이만 바빴다

 

5. 올빼미

하루는 아버지가 작은집에서 뚱뚱한 아이를 데려왔다 인사해라, 네 셋째형이다 새로 생긴 형은 말도 하지 않았고 학교에 가지도 않았다 그저 밤중에 앉아서 눈뜬 곰들과 노는게 전부였다 연탄가스를 마셨다고 했다

 

6.불새

우리는 정복이네보다 해발 30미터가 낮은 곳에 살았다 길이 점점 좁아졌으므로 그 집에 불이 났을때 소방차는 우리 집 앞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불타는 곰발바닥들을 버려두고, 그렇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사실 독수리 오형제는 독수리들도 아니고, 오형제도 아니다. 다섯조류가 모인 의남매다.다섯이 모이면 불새로 변해서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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