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황혼무렵 시 한잔18-백석의 여승과 오스칼의 참사랑

화려하게 피고 지는 장미를 기억하기

by 스포쟁이 뚱냥조커


.




통영에 머물던 백석은 다시 평안도로 돌아와서 한 여승을 만났다. 그리고 시인은 그녀의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은 것을 보고 불경처럼 서러워진다.


백석의 대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는 말만큼 나는 백석의 이 불경처럼 서러워진다는 표현을 사랑한다. 보들레르니 네루다니 세계 그 어떤 대단한 시인과 견주어 봐도 백석의 이런 표현력은 대체불가능한 게 아닐까. 이 식민지시절 수난이 가득한 여승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우울과 차분한 공감이 함께 들어간 표현을 백석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을까.


딸아이를 때리면서라도 옆에 두고 평안도 시장판에서 키우며 옥수수를 팔던 여인. 가을밤같이 차게 울며 딸을 키우리라 다짐했지만 지아비는 십 년이 넘어도 돌아오질 않고 딸 또한 돌아오지 않는 돌무덤으로 가버린다. 지금 세상보다 도라지꽃이 좋아서 돌무덤으로 가버린 걸까 산꿩도 서럽게 우는 슬픈 날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수난으로 가득 차는 시절이란 쉽게 말하기 어렵다. 시민들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기 힘든데 무리한 미국 독립 전쟁 지원과 왕실 귀족의 사치로 망해가던 18세기말 프랑스도 그렇지 않았을까. 오스칼이 살던 그 수도 파리조차.




우연히 파리의 빈민가로 나왔다가 식사를 대접받은 오스칼은 그냥 야채 쪼가리밖에 없는 수프를 앞에 두고 충격을 받는다. 오르되브르에 여러 수프, 스테이크에 후식 젤리같은 네다섯 단계의 코스 요리를 기본 식사로 해왔던 귀족 오스칼로선 전쟁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는 파리의 시민들이 이렇게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파리의 시민들이 이리도 삶이 힘겨운 그 원인은 바로 왕실 즉 국가의 방만한 재정운영이었다. 그런데도 공주로 태어나 돈 걱정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마리 앙트와네트는 세금을 더 걷으면 되지 않냐는 태연한 소리를 하지만 재무 관료들은 그저 땀을 뻘뻘 흘릴 뿐이다... 하지만 이런 왕비 마리 조차도 현실의 벽을 느끼는 순간이 왔으니...






일국의 왕자가 병으로 7살에 죽었는데 그 장례식을 치를 돈조차 없다니, 그제서야 철없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도 사태의 심각성을 직시하게 된다. 심지어 어느 나라나 다른 부서는 몰라도 군대는 제대로 잘 먹이기 마련인데, 오스칼 휘하의 프랑스 병사들은 다들 영양실조에 시달린다는 충격적인 진실... 이 병사들은 보급받은 칼도 자꾸 분실했다는 황당한 소리를 하며 오스칼을 당황시키는데, 알고보니 빵이든 칼이든 군대에서 보급받은 것을 다 암시장에다 팔고 그 돈으로 가족들을 겨우겨우 먹이고 의사에게도 진료받는 형편인 게 프랑스 일반 시민의 비참한 현실이었다...






이런 현실들을 알게 되자 귀족인 오스칼은 계몽주의자인 루소와 볼테르 등을 읽으며 부조리한 프랑스 사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더더욱 고민하게 된다. 물론 왕도 아니고 일개 귀족 한 명인 그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녀가 홀로 결정할 수 있는 확실한 것이 단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제 페르젠을 진정으로 마음에서 떠나보내고 오래도록 자신과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에게 보답하는 인생의 과업.




물론 귀족인 오스칼과 평민이자 자르제 가문의 하인이나 다름없는 앙드레 사이엔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오래된 관습에서 해방된 오스칼에겐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그저 자유롭게 삶의 기쁨을 찾는다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살아있는 게 기쁜 두 사람. 이제 오스칼과 앙드레는 신분의 차이든 사회의 눈치든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파리 시내는 당장이라도 유혈사태가 발생하기 직전일 정도로 세금과 왕궁에 대한 분노가 절정인 가운데, 오스칼은 부하들과 유사시 시위를 진압하라는 국가의 명령을 받고서 칼을 차고 파리로 나가지만...




놀랍게도 오스칼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은 이제 백작의 칭호와 영토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선언하고 더 이상 왕가의 개가 아닌 자유로운 시민의 편에 서겠다고 말한다. 일로 오스칼의 부하 12명은 반역 혐의로 처형 위기에 몰리지만 이 또한 민중과 함께 과감히 구출에 성공한다.




심지어 오스칼은 단지 일시적인 변심으로 시위를 찬동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시민군을 도우며 이후 그 유명한 역사적인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서 시민군을 지휘하는 선두에 선다...


오스칼과 앙드레의 오래되고 깊은 아름다운 사랑


허나 신분과 사회의 벽을 넘는 이런 사랑은


항상 로미오와 줄리엣의 냄새를 풍긴다


나는 또다시 불경처럼 서러워질 것만 같다...


바스티유 습격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오스칼은


앙드레와 함께 더 나은 프랑스의 미래를 맞이할까


아니면 장미는 어떤 미래로 가게 될까...


불안한 예감을 잠재우려 소주 한 잔이 그리워진다


황혼 무렵에 시 한잔...


Fin.





다음 한 잔은 백석과 오스칼의 마지막. 에필로그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