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샷의 철학 철학의 스샷 2 아즈마의 느슨 철학 b
내 오래된 가족들보다도 친구들보다도
훨씬 자주 만나고 친근해진 카페 고양이 언니.
내가 직접 키우진 않았지만 사료값을 보태주니까
아주 조금은 그냥 남보다는 가족같이 느껴도 될까
물론 나 혼자만의 일방적 유대감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5년 넘게 거의 매주 봤으니까
내가 올 때마다 내 노트북 위로 올라오려는
이 귀여운 언니를 볼 때마다 가족처럼 푸근하다
이런 가족같은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일본의 아즈마 히로키 아재가 오배송한 작은 편지.
햄스터를 키웠지만 2년뒤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딸이 또 친구에게 햄스터 두 마리를 데려와버렸다.
어쩌면 딸의 행동에 난감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햄스터 둘이 노는 걸 보면 무조건 즐거워진다.
순식간에 남의 동물에서 가족이 되어버리는 하루.
물론 가족은 원래 혈연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고
인간은 햄스터와 피가 이어질 리가 없는데도
언제부턴가 반려동물이라고, 가족이라고 부른다.
왜 우리는 동물을 가족이라 부르는 걸까?
데리다를 전공한 아즈마를 비롯해서 수천년 서양 철학의 전통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을 다루어왔다. 응용윤리학의 피터 싱어 정도만이 동물권을 주장하는 한 줌의 철학 분파다. 그렇지만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반려동물 천만을 넘어가는 시대에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자들의 중대한 과업이 아닐까?
가족을 혈연 집단이라고 사전에서 자연스럽다는 듯이 정의하고 다들 그렇게 받아들이지만, 사실 현실에는 혈연이 아니라도 같이 살면서 가족이라 부르는 관계들이 많이 존재한다. 애당초 국민국가, nation-state라는 존재 자체가 그냥 공동체가 아닌 비혈연적 가족관계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그저 국적이 같을 뿐이지만 손흥민이나 한강 같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한국인의 뉴스를 들으면 왠지 뿌듯해지고 소위 국뽕에 취하고 싶어진다. 마치 같은 가족중에 한 명이 크게 성공해서 가문의 영광을 드높인 것처럼.
이렇듯 인간이 아니라도 동물이나 기계나 가상의 존재조차도 가족이라고 여기고 대우한다는 건 사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이다. 피그말리온 같은 고대 그리스신화의 우화만 보더라도, 인간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아니라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큰 만족을 느끼지 않던가. 이러한 가족 개념의 강력한 확장성에 아즈마 아재는 크게 주목하는 듯하다.
이렇듯 혈연이 아니어도 가족인 관계들은 이미 현실에 차고 넘친다. 게다가 아즈마 말대로 이렇게 같이 사는 존재들은 왠지 모르게 서로 닮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골격도 근육도 다른데 인간과 동물은 대체 어떻게 닮는 게 가능한가? 물론 그것은 대단히 주관적인, 어쩌면 인간 중심주의적인 편향적인 오해와 착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런 오해, 오배송에 가까운 일방적인 인간의 시선과 편향적인 주관이 선사시대처럼 동물을 낯설고 두려운 타자로 여기는 게 아니라 인간의 친구와 가족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닐까? 어쩌면 바로 그런 가능성이 3장이라는 지면 관계상 다 말하지 못한 아즈마의 다른 주저인 관광객의 철학이나 정정 가능성의 철학 등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우편적인 오배의 철학일지도.
아즈마가 그의 사상적 스승격인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빌려서 그의 박사논문에서도 말하듯, 그저 다른 철학을 비판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가능성의 중심' 으로 비판하면서 새롭게 읽어낼 것인가?동물과 가족에 대한 이 짧은 글을 읽어보면서 낯선 타자의 철학이 종종 오배송되는 사건이 또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자 그러면 또 내 무릎을 노리고 궁디팡팡을 기다리는 나의 달콤하고 귀여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언니, 너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