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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n 11. 2019

기생충의 송강호와 벤야민의 곱추난쟁이/스포일러 에세이3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우리가 기억하고 회상함으로써.

기생충 스포일러 에세이3-송강호와 벤야민의 곱추난쟁이 190611 홍대동 조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 -Karl Marx. 1848-1850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맑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인류가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행위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중에서.

     

 우리는 흔히 혁명을, 역사를 미래의 진보로 보내는 기관차 같은 것이라고 상상해왔다. 이는 분명 맑스가 말한 것처럼 진보주의의 전통이었다. 어쩌면 봉준호의 전작 설국열차는 조금 지나치리만큼 이런 전통의 상징들에 천착한 결과물이라고도 볼수 있다. 허나 또한 결말에서 송강호는 “이거 열차 터져서 멈추면 다들 뒤지기라도 할거 같지? 아니야 시벌” 라고 대사를 뱉으며 설국열차에 폭탄을 터뜨림으로써 벤야민의 말처럼 세계사의 열차에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행위를 해낸다. 그 이후 망가진 열차에서 내린 아이들이 백곰을 만나 어떻게 되었는지는 봉준호 감독은 사실상 관객들의 상상에 맡긴다.


 이는 저번 글에서 언급한 대로, 억압받은 자들의 전통에서 배울 수 있는 예외상태의 상례화를 끝장내는, ‘진정한 예외상태’ 또는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국열차에서의 크리스 에반스나 송강호는 마치 이미 준비된 자, 예언된 메시아의 도래처럼 느껴지고 캐릭터 자체의 극 안에서의 성장 같은 부분은 없다시피 하다. 그렇다면 이런 예정된 파국의 메시아의 도래가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 대중들 사이에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솟아오르는 혁명은 가능한가? 그러한 혁명의 역사적 주체는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이 의문에서 봉준호의 기생충이 만들어졌고, 이를 벤야민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먼저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1번 테제를 살펴보자.     


 알려진 어느 자동기계 이야기에 따르면, 이 기계는 체스 시합에서 상대가 어떤 수를 두든 응수해 그 시합을 이길 수 있다. 터키풍 옷차림을 하고 수연통을 입에 문 인형이 넓은 책상 위에 놓인 체스판 위에 앉아 있다. 거울 장치는 이 책상을 사방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착각을 볼러일으킨다. 실제로는 체스의 명수인 꼽추 난쟁이가 그 안에 숨어서 인형의 손을 끈으로 조종한다. 사람들은 이 장치와 꼭 빼어 닮은 것을 철학에서 표상할 수 있다. 사람들이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이 인형은 언제든지 승리하게 되어 있다. 오늘날 주지하다시피 왜소하고 흉측해졌으며 더욱이 더 이상 그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신학의 시중을 받는다면, 그 인형은 어떤 상대와도 과감히 겨뤄볼 수 있다. -1번 테제. 양창렬 옮김


 그야말로 주지하다시피, 다들 알다시피 기생충은 계급, 경제적 격차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에 끝없이 등장하는 계단 등의 수직적 미쟝센을 봐도 그렇고 가난과 돈에 대해서 말하는 인물들의 대사를 봐도 그러하다. 그리고 예고편과 포스터에도 등장한 송강호의 대사. “아들아, 너는 역시 계획이 다 있구나!”의 ‘계획’은 굉장히 중요한 복선이자 영화가 나오는 내내 주요 키워드로 작동한다. 이는 마치 진보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계획을 가지고, 중세 장원경제에서 자본주의로, 또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코뮤니즘 체제로 넘어가는 것을 역사의 필연적 법칙이라 피를 토하며 주장했던 19세기-20세기의 세계사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벤야민의 말처럼 이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인형은 언제든지 승리하게 되어 있다. 다만 신학, 드러내서는 안되는 꼽추난쟁이의 은밀한 도움을 통해서만 그러하다. 이 또한 기생충에서 송강호의 대사와 연결지어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은가?


 처음에 기우네 가족은 박사장네에 취업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기존의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쫓아내면서까지 가족 전원이 박사장네에 들어가는 것에 마침내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기우네 가족의 취업을 자축하는 술이 필라이트에서 삿뽀로로, 삿뽀로에서 시바스리갈같은 양주로 바뀌는 씬은 봉테일이라는 별명다운 봉준호의 장기이자 실로 유물론적이다. 허나 갑자기 초인종이 눌리고 돌아온 가정부에 의해서 영화는 블랙코미디에서 공포, 스릴러로 완전히 뒤집어지고, 캠핑에서 돌아오는 박사장네 가족으로 인해 또다시 엄청난 위기를 맞는다. 겨우겨우 도망친 기우네 가족은 수해로 인해 생긴 난민들의 대피소에 다같이 눕는다. 자기한테 계획이 다 있다면서 일단 도망치자고 말한 가장 송강호는 옆에 누운 기우한테 슬그머니 고백을 한다.     


 “아들아,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있는데, 그건 바로 무계획이야.”    


 이는 당연히 굉장히 불합리하다. 애초에 박사장네에 취업하기 이전에도 송강호는 능력없는 가장으로서 아내에게 구박받는 대사로 영화가 시작한다. 그리고 기껏 성공한 계획이 박사장네에서 대책없이 술파티를 벌이다가 다 어그러졌음에도 굉장히 무책임한 대사를 내뱉은 것이다. 허나 관점을 다르게 본다면, 이는 송강호가 계획의 무의미성을 깨닫고 나서 일종의 신학에 기대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한바 있지 않은가. “불합리하기에 나는 신을 믿는다.” 로또를 사는 것은 합리적인 이성적 판단으로는 굉장히 바보같은 행동이다. 합리적으로 계산하면 기댓값이 절대로 투자한 비용 이상으로 올라갈 수가 없다. 허나 인간은 그런 초월적인 믿음에 기대지 않으면 때때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벤야민도 그렇기에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자동기계가 항상 승리하려면, 신학이라는 꼽추 난쟁이가 필요하다고,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은밀하게 작동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벤야민의 신학에 대해 좀더 이해하려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테제 9번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날개는 날 준비가 되어 있고

 나는 기꺼이 되돌아가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평생 머문다 해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기에.

 -게르하르트 숄렘. ‘천사의 인사’

     

 파울 클레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자기가 꼼짝 않고 응시하던 어떤 것에서 멀어지는 듯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부릅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필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천사의 얼굴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우리에게 일련의 사건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곳에서 그 천사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아 올리고 또 이 잔해를 자기 발 앞에 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깨우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낙원에서 폭풍이 자신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천사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해 저항할 수 없이 천사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천사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런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테제 9번. 발터 벤야민. 양창렬 옮김.

        

 벤야민에 대해 화재경보라는 해설서를 쓴 미카엘 뢰비의 말처럼, 이 구절은 벤야민의 가장 유명한 구절로서, 아주 다양한 맥락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인용되고 해석되고 이용되어왔다. 보통 천사는 인간에게 미래를 예언해주는 역할로 많이 등장하지만, 재미있게도 이 파울 클레의 앙겔루스 노부스, 새로운 천사의 얼굴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심지어 과거의 잔해들을 끝없이 쌓아 올리고 죽은 자들을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하지만 낙원에서 폭풍이 자신의 날개를 접을 수도 없을만큼 세차게 불어오기에 날개를 접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런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벤야민은 쉽게 신봉되어지는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 자체를 의문의 폭풍 속으로 던져보는 것이다.


 기생충의 마지막 씬에서 지하에 숨어서 살아남은 송강호가 모르스 부호로 희미하게나마 계속 자기의 메시지를 보내고, 자기가 살아남고 싶고 미래를 만들어가고 싶다면 돈을 버는 것에만 몰두해야할 기우가 이 송강호를, 과거를 자꾸만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천사의 이미지와 하나의 알레고리로써 겹쳐지지 않는가? 기우는 그 과거를 바라보면 자꾸만 지난 날의 파국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스크린을 보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지난 글에서도 말했듯이 세월호 참사나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 등에 대해 우리는 종종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마주치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거는 이제 잊자. 심지어 죽은 자식은 부모의 가슴에 묻어둬야 한다고 발언하는 정치인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은 역사를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일까. 오히려 과거를 제대로 회상하는 기억 투쟁으로써, 우리는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역사라는 기관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당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초반부의 블랙코미디에 신나게 웃다가 중반부의 반전이후 씁쓸한 웃음으로 전환된 우리들에게, 봉준호 감독도 은밀하게 희미하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우리가 회상하고 기억해야 될 무언가에 대해서. 결국 희미하게나마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p.s. 이 세편의 기생충 에세이는 고 김진영 선생님의 벤야민 강의록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책과, 미카엘 뢰비 지음, 양창렬 옮김-‘발터 벤야민:화재경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읽기’ 책의 번역과 해설에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벤야민에 대하여 더 관심이 있는 분은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P.S 2. 꼽추 난쟁이가 결국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족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보충으로 내일 추가로 새벽감성 조커의 회상일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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