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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Aug 28.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37-신암행어사 리뷰3 수수께끼

수수께끼로 가득찬 이 힘든 생이여, 다시한번!

차라투스트라 3부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258-262p 중에서 인용 및 필사함



1.

저 행복이 넘치는 섬에서 그와 함께 배에 오른 사람이 있어, 차라투스트라가 배 안에 있다는 소문이 뱃사람들 사이에서 돌자 이내 커다란 호기심과 기대가 일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틀이 지나도록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는 슬픔으로 인해 냉담해 있었으며 귀머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과 물음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틀째 되는 날 말은 여전히 없었지만 그래도 귀만은 다시 열었다. 먼 곳에서 와서 다시 먼 곳으로 가려는 그 배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진기하고 모험적인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먼 길을 여행하는, 모험이 없는 삶을 좋아하지 않는 모든 자들의 벗이었다. 그런데 보라!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드디어 그의 혀가 풀리고 심장의 얼음이 녹아내렸으니,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너희 담대한 탐색가, 모험가, 그리고 일찍이 교활한 돛을 달고 위험천만한 바다를 항해한 일이 있는 자들에게,

너희, 피리 소리 하나로도 길을 잃고 온갖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영혼을 지닌, 수수께끼에 취해 있는 자들, 어스름을 즐기는 자들에게.

겁먹은 손을 하고는 실 한 오라기 더듬어 찾아보려 하지 않고 추측할 수 있는 데서 따져가며 밝혀내기를 싫어하는 것이 너희이기에,

너희에게만 내가 본 수수께끼를, 더없이 고독한 자의 곡두를 이야기하리라.

최근에 나 시체와 같이 빛바랜 어스름 속을 울적한 기분으로 걷고 있었다. 울적하고 완고한 심사로 입술을 깨문 채. 내게 고작 태양 하나가 진 것이 아니었다.

자갈밭을 가로질러 고집스럽게 위로 나 있는, 잡초도 관목도 찾아 볼 길 없는 심술궂고 호젓한 오솔길, 산 속의 오솔길이 나의 고집스러운 발 밑에서 달그락거렸다.

비웃듯이 달그락대는 자갈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가며 미끄러운 돌을 밟아 제껴가면서. 나의 발은 힘겹게 위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위를 향하여. 나의 발을 저 아래로 끌어내리고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정령, 나의 악마이자 불구대천의 적인 중력의 정령에 맞서.

위를 향하여. 반쯤은 난쟁이고 반쯤은 두더지인, 절름발이이면서 다리를 절게 만드는 그가 내 어깨에 앉아 있었지만. 나의 귀 속으로 납을, 나의 뇌 속으로 납덩이 같은 사상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면서.

“오 차라투스트라여, 너 현자의 돌이여!”그는 비웃듯이 한 마디 한 마디 속삭였다. “너 위를 향해 너를 던져 올렸겠다. 위로 던져진 돌은 어김없이 도로 떨어지기 마련이거늘!

오 차라투스트라여, 너 현자의 돌, 투석용 돌이여, 별을 깨부수는 자여! 너 너 자신을 그토록 높이 투척했던 것이다. 위로 던져진 돌은 어김없이 떨어지기 마련이거늘!

오 차라투스트라여, 너 네 머리 위로 떨어져 너를 박살내도록 되어 있는 돌을 멀리도 던져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돌은 다시 네 머리 위로 떨어지고 말 것을!“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난쟁이는 입을 다물었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의 침묵은 나를 짓눌렀다. 이런 상태로 둘이 있는 것, 그것은 진정 홀로 있는 것보다 더 외로운 일이다!

나는 오르고 또 올랐다. 꿈을 꾸기도 했고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고약한 학대에 지친, 다시금 한층 고약한 꿈에 놀라 깊은 잠에서 깨어난 병자와도 같았다.

그러나 내 안에는 용기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그것이 나의 온갖 낙담을 남김없이 죽여 없애왔던 것이다. 그 용기가 마침내 내게 멈춰 서서 말하도록 명했다. “난쟁이여! 너! 아니면 나다!”

용기야말로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공격적인 용기야말로, 모든 공격 속에는 진군의 나팔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더없이 용기 있는 짐승이다. 바로 그 용기에 힘입어 그는 온갖 다른 짐승들을 극복해왔던 것이다. 진군의 나팔소리로 모든 고통까지도 극복한 것이다.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그 어느 것보다도 심오한 고통이었는데도 말이다.

용기는 심연에서 느끼는 현기증까지 죽여 없애준다. 그런데 사람이 있는 곳치고 심연이 아닌 것이 어디 있던가! 바라본다는 것 그 자체가 심연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아닌가?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그것은 연민의 정까지도 죽여 없애준다. 연민의 정이야말로 더없이 깊은 심연이 아닌가. 생을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면, 고뇌까지도 그만큼 깊이 들여다보게 마련이다.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공격적인 용기는,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까지 죽여 없애준다.

이같은 말 속에는 많은 진군의 나팔소리가 들어 있다. 귀 있는 자, 들을지어다-

 

2.

“잠깐! 난쟁이야!”나는 말했다. “나! 아니면 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서 더 강한 자는 단연 나다. 너는 내 심연의 사상을 모른다. 그것을 참고 견뎌내지도 못한다!”

그러자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닌가. 난쟁이. 그 호기심 많은 자가 내 어깨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러더니 내 앞에 있는 돌 위에 웅크리고 앉는 것이었다. 우리가 발을 멈춘 곳, 바로 그곳에 성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 하나가 있었다.

“여기 성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을 보라! 난쟁이여!”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것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두 개의 길이 이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 길들을 끝까지 가본 사람이 아직은 없다.

뒤로 나 있는 이 긴 골목길. 그 길은 영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저 쪽 밖으로 나 있는 저 긴 골목길. 거기에 또다른 영원이 있다.

...











/









우리의 삶은 갖가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때때로 해결되는 수수께끼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미완의 난제로 남겨둔 채 우리는 살아가기 바쁘다. 그러나 미뤄놓았던 수수께끼는 갑자기 우리를 덮쳐서 삶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나를 너무나 고독해지게 만들어 친구도 애인도 버리고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것에만 몰두하게 되기도 한다.


자기를 극복하여 더 높은 존재가 되려는 차라투스트라에게도 이런 삶의 수수께끼는 피해갈 수 없었다. 사람마다 각자 삶이 다르기에 각자 삶의 수수께끼도 당연히 다른 법. 니체의 문학적 분신  차라투스트라에겐 모든 것을 무겁게 만들어 춤추지 못하게 방해하고 날아오르려는 것을 떨어뜨리는 이 '중력의 령'이야말로 최대의 난적이자 수수께끼다.


작중에 차라투스트라를 현자의 돌이라 부르는 난쟁이가 나온다. 현자의 돌이란 해리포터같은 판타지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중세 유럽 설화에서 길가의 돌맹이를 황금으로 변환하는 연금술사들의 환상의 물질이다. 난쟁이는 차라투스트라를 현자의 돌이라 부르지만 현자의 돌도 위로 날아오르면 결국엔 떨어지는 돌맹이라며 그를 찬양하는 척 놀려먹는데, 이런 난쟁이는 중력의 령이 실체화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라투스트라는 이런 최대의 난적, 수수께끼에 맞서서 너 아니면 나라고 외치면서 자기 안의 온갖 낙담을 없애는 용기를 꺼내든다. 그리고 이 공격적인 용기의 힘으로 자기 안의 심연, 연민의 정 죽여버리면서 이렇게 문을 외운다.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한번!"


기껏 동굴에서 열심히 수련하고 깨달았으니 이젠 베푸는 덕을 실천하려 했건만, 사람들의 오해와 질투에 시달리기도 하고 자다가 난데없이 살무사에 물리기도 하고 타란툴라같은 독거미 떼거리에 당할 뻔하기도 한 차라투스트라. 보통 인간이라면

 "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불행할까" 하고 끝없는 자기 연민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너무나 고통스런 생을 살고 있는 차라투스트라 아니 니체는, 그런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바로 이 생을 다시한번 살겠노라 하고 위대한 자기 긍정의 주문을 외친다.


니체의 이 문구는 아모르파티, 운명애라는 말 만큼이나 후대의 온갖 예술과 매체에서 자주 인용되었고 그럴 만한 울림이, 거부하기 힘든 시적 신성함이 깃들어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런 확신을, 자기 긍정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 스스로가 바로 신이라고 하더라도 주변인들을 끄덕이게 할 수 있으리라.


 이 글에서 계속 다뤄온 웹툰 신암행어사에서는 죽음 직전의 문수가 바로 이렇게 거룩힌 자기 긍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리고 니체의 난적인 중력의 령 역할은, 너 아니면 나라고 외치는 적수는 문수에겐 말할 것도 없이 아지태일 것이다.




만다라케 침으로 환술을 사용하던 유의태를 제압한 뒤에도 온갖 곳을 야행하며 암행어사로서 격전을 치른 문수는 결국 생의 한계에 달한다.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하병이 악화되고 외상도 더욱 깊어져 죽기 직전인 문수에게, 갑자기 아지태가 나타나 네가 나에게 한번 타격을 주긴 했지만 넌 결국 날 절대 이길수 없다고, 인간이 임의로 정한 세상의 선악따위 하얗게 지워버리고 더 재밌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조롱을 던지고 사라진다.




물론 태산같이 굳건한 문수가 그런 조롱 따위에 굴할리는 없다. 사라져라 말 한마디면 사람을 흔적도 안 남게 죽여버리는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아지태는 어차피 자신의 난적 문수는 죽기 직전이고 자신은 더욱 세력을 불려나가는 중이니 그저 재미로 문수를 살려놓기로 한다. 그리고 아지태가 떠나고 정말로 죽기까지 몇초 남지 않은 문수는 마지막으로 방자에게 부탁를 남긴다.



그것은 바로 이전에 유의태를 상대할 때 챙겨놓은 만다라케 침을 자신에게 놓으라는 유언이었다. 자신은 이제 긴 꿈을 꾸겠지만 절대 죽지 않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 그런데 바로 이 만다라케 침에 대해 우리는 문수가 이전에 어떻게 평가했는지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유의태가 이 침을 맞으면 기적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자 문수는 단호히 거절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자신이 혹시라도 패배하거나 실수로 저 침을 맞게 되면 산도 춘향에게 주저없이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릴 정도로, 문수는 만다라케 침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전 글에서 강조한 것처럼 문수는 '기적' 이라 쓰여 있으면 '사기'라고 읽어야 한다고, 세상에 기적따위는 절대 없고 인간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게 온당하다고 확신하는 존재다. 그런 그가 왜 이렇게 스스로의 신념에 모순되는 일을 벌이는 걸까? 설마 이는 흔히 말하는 캐붕, 캐릭터 설정 붕괴일까?



허나 이를 문수가 스스로의 신념을 저버렸다고 해석하는 것은 신암행어사 작품을 주의깊게 읽지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문수는 너무나도 뿌리가 깊어 산사태가 나더라도 홀로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아카시아 나무에 비유되는 캐릭터다. 문수가 스스로 만다라케 침을 맞은 것은 기적을 믿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강해봤자 결국 얄팍한 환각제 따위에 자신이 질 리가 없다고, 자신을 믿 긍정하는 강인한 몸과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럼에도 문수가 이미 숨이 꺼져가기 직전인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하나의 도박수를 던졌다는 현실 자체는 작중에서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온몸이 한계의 한계에 달한 상황에서 최대의 난적 아지태를 만난 이 절체절명의 난관에선, 그런 도박적인 수이건 정공법이건 뭐든 가능성이 낮아도 시도하는 게 올바른 병법이자 훌륭한 장군의 덕목이 아닐까. 이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문수의 과거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작중에서 종종 암시되었듯이 문수는 암행어사 이전에 쥬신의 군 전체를 통솔하여 악수들, 쾌타천과의 전쟁을 이겨낸 전설적인 대장군이었다. 게다가 모두가 신과 같이 두려워하던 아지태에게 유일하게 절망하지 않고 한방 먹이는데 성공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모두가 문수라면 아지태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걸었고 문수 자신도 아지태에게 자신이 질 리가 없다고 확신했던게 아닐까. 다음 글에선 바로 이 문수에게 최대의 수수께끼, 중력의 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아지태에 대해 좀더 다뤄보기로 하자... 결국 니체가 난쟁이에게 나 아니면 너라고 대결을 걸듯이, 신암행어사 세계관에선 문수 아니면 아지태라는 영원의 갈림길이 있는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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