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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Aug 29.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38-신암행어사 리뷰4 아지태,과거

선과 악의 기준을 의문시하고 재미가 우선인 아지태

차라투스트라 3부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258-265 중에서 인용 및 필사함



1.

...

비웃듯이 달그락대는 자갈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가며 미끄러운 돌을 밟아 제껴가면서. 나의 발은 힘겹게 위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위를 향하여. 나의 발을 저 아래로 끌어내리고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정령, 나의 악마이자 불구대천의 적인 중력의 정령에 맞서.

위를 향하여. 반쯤은 난쟁이고 반쯤은 두더지인, 절름발이이면서 다리를 절게 만드는 그가 내 어깨에 앉아 있었지만. 나의 귀 속으로 납을, 나의 뇌 속으로 납덩이 같은 사상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면서.

“오 차라투스트라여, 너 현자의 돌이여!”그는 비웃듯이 한 마디 한 마디 속삭였다. “너 위를 향해 너를 던져 올렸겠다. 위로 던져진 돌은 어김없이 도로 떨어지기 마련이거늘!

...

나는 오르고 또 올랐다. 꿈을 꾸기도 했고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고약한 학대에 지친, 다시금 한층 고약한 꿈에 놀라 깊은 잠에서 깨어난 병자와도 같았다.

그러나 내 안에는 용기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그것이 나의 온갖 낙담을 남김없이 죽여 없애왔던 것이다. 그 용기가 마침내 내게 멈춰 서서 말하도록 명했다. “난쟁이여! 너! 아니면 나다!”

용기야말로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공격적인 용기야말로, 모든 공격 속에는 진군의 나팔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더없이 용기 있는 짐승이다. 바로 그 용기에 힘입어 그는 온갖 다른 짐승들을 극복해왔던 것이다. 진군의 나팔소리로 모든 고통까지도 극복한 것이다.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그 어느 것보다도 심오한 고통이었는데도 말이다.

용기는 심연에서 느끼는 현기증까지 죽여 없애준다. 그런데 사람이 있는 곳치고 심연이 아닌 것이 어디 있던가! 바라본다는 것 그 자체가 심연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아닌가?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그것은 연민의 정까지도 죽여 없애준다. 연민의 정이야말로 더없이 깊은 심연이 아닌가. 생을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면, 고뇌까지도 그만큼 깊이 들여다보게 마련이다.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공격적인 용기는,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까지 죽여 없애준다.

이같은 말 속에는 많은 진군의 나팔소리가 들어 있다. 귀 있는 자, 들을지어다-

 

2.

“잠깐! 난쟁이야!”나는 말했다. “나! 아니면 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서 더 강한 자는 단연 나다. 너는 내 심연의 사상을 모른다. 그것을 참고 견뎌내지도 못한다!”

그러자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닌가. 난쟁이. 그 호기심 많은 자가 내 어깨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러더니 내 앞에 있는 돌 위에 웅크리고 앉는 것이었다. 우리가 발을 멈춘 곳, 바로 그곳에 성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 하나가 있었다.

“여기 성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을 보라! 난쟁이여!”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것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두 개의 길이 이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 길들을 끝까지 가본 사람이 아직은 없다.

뒤로 나 있는 이 긴 골목길. 그 길은 영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저 쪽 밖으로 나 있는 저 긴 골목길. 거기에 또다른 영원이 있다.

이들 길은 예서 맞부딪치고 있다. 서로 반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 바로 이 성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 위에 성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의 이름이 씌어 있구나. ‘순간’이라는.

난쟁이여, 그러나 누군가가 있어 이들 가운데 하나를 따라 앞으로, 더욱 앞으로, 그리고 더욱 멀리 갈 경우, 그래도 이 길들이 영원히 맞부딪치고 있으리라고 믿는가?

난쟁이는 경멸조로 중얼거렸다. “곧바른 것이란 하나같이 속임수다. 진리는 하나같이 굽어 있으며 시간 자체도 일종의 둥근 고리다.”

“너, 중력의 정령이여!”나는 화가 나서 말했다.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나 네가 지금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곳에 계속 앉아있게 내버려두겠다. 이 절름발이야. 내가 너를 이 높은 곳까지 업고 오지 않았는가!

보라, 여기 순간이라는 것을!“나는 말을 이어갔다. ”여기 순간이라는 성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로부터 길고 영원한 골목길 하나가 뒤로 내달리고 있다. 우리 뒤에 하나의 영원이 놓여 있는 것이다.

만물 가운데서 달릴 줄 아는 것이라면 필히, 이미 언젠가 이 골목길을 달렸을 것이 아닌가? 만물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필히, 이미 언젠가 일어났고, 행해졌고, 지나가버렸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모든 것이 이미 존재했었다면, 난쟁이여, 여기 이 순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성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이 길 또한 이미 존재했었음에 틀림없지 않은가?

이 순간으로 하여금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물을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길 수 있도록 모든 사물이 이렇듯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 자신까지도?

만물 가운데서 달릴 줄 아는 것이라면 언젠가 이 기나긴 골목길 저쪽으로도 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빛 속에서 기어가고 있는 이 더딘 거미와 이 달빛 자체, 함께 속삭이며, 영원한 사물들에 대해 속삭이며 성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에 앉아있는 나와 너, 우리 모두는 이미 존재했었음에 틀림없지 않은가?

그리고 되돌아와 우리 앞에 또다른 저 골목길, 그 길고도 소름 끼치는 골목길을 달려나가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영원히 되돌아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점점 소리를 죽여가며, 나 자신의 여러 생각과 속생각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개 한 마리가 짖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일찍이 그토록 짖어대는 개를 본적이 있던가? 나의 생각은 옛날로 달려가보았다. 그렇다! 내가 아이였던, 까마득한 어린 시절로.

그때도 어떤 개가 그렇게 짖어대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개들조차도 유령의 존재를 믿는, 그처럼 적막하디 적막한 한밤중에 털을 곤두세우고 머리를 치켜든 채 떨고 있는 개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측은했다. 바로 그때 보름달이 쥐죽은 듯 조용하게 지붕 위로 떠올랐다. 때마침 둥글게 이글거리며 달은 멈춰섰다. 낯선 사람의 소유지에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평평한 지붕 위에 소리를 죽여가며.

그때 그 광경에 개가 무서워 떨었던 것이다. 개들도 도둑과 유령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그토록 짖어대는 것을 듣자 새삼 측은했다.

난쟁이는 방금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이지? 성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은? 거미는? 그리고 그 모든 속삭임은? 나 꿈을 꾸고 있었나? 아니면 깨어 있었나? 나 홀연히 험난한 절벽 사이에 서 있었다. 홀로, 황량한, 더없이 황량한 달빛을 받으며.

그런데 거기에 어떤 사람이 누워 있었으니! 바로 거기에! 그리고 아까 그 개가 껑충껑충 뛰어오르고, 또 털을 곤두세운 채 낑낑대고 있다가 다가오는 나를 보고는 또다시 짖어댔다. 그리고 울부짖었다. 내 일찍이 개가 그토록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진정, 내가 그때 보았던 것, 그와 같은 것을 나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나 몸을 비틀고 캑캑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어떤 젊은 양치기를 본 것이다. 입에는 시커멓고 묵직한 뱀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고.

내 일찍이 한 인간의 얼굴에서 그토록 많은 역겨움과 핏기 잃은 공포를 본 일이 있던가? 그는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인가? 뱀이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 꽉 물고 있는 것을 보니.

나는 손으로 뱀을 잡아당기고 또 잡아당겼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뱀은 꼼짝하지 않았으니. 그때 내 안에서 “물어뜯어라! 물어뜯어라!”부르짖는 어떤 것이 있었다.

“대가리를 물어뜯어버려라! 물어라!”내 안에서 나의 전율, 나의 증오, 나의 연민, 내게 있는 좋고 나쁜 것 모두가 한목소리로 부르짖어댄 것이다.

너희, 담대한 자들이여! 탐색가, 모험가들이여, 그리고 너희 가운데 교활한 돛을 달고 미답의 바다를 향해 떠나본 적이 있는 자들이여! 너희 수수께끼를 풀기 좋아하는 자들이여!

자, 내가 그때 본 수수께끼를 풀어달라. 더없이 고독한 자가 본 저 곡두를 해석해달라!

그것은 하나의 곡두, 하나의 예견이었으니 말이다. 나 그때 그 비유 속에서 무엇을 본 것이지?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나야 할 그 사람은 누구이고?

목구멍 속으로 뱀이 기어든 그 양치기는 누구지? 더없이 묵직하고 더없이 시커먼 온갖 것이 그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게 될 그 사람은 누구이고?

양치기는 내가 고함읅 쳐 분부한 대로 물었다. 단숨에 물었다! 뱀대가리를 멀리 뱉어내고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이제 더 이상 양치기나 여느 사람이 아닌, 변화한 자, 빛으로 감싸인 자가 되어 그는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땅에 그와 같이 웃어본 자는 없었으리라!

오 형제들이여, 나 사람의 웃음소리가 아닌 그 어떤 웃음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제 어떤 갈증이, 결코 잠재울 수 없는 어떤 동경이 나를 갉아먹고 있구나.

이같은 웃음에 대한 동경이 나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아, 어떻게 나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견뎌낼 것인가! 지금 죽기라도 한다면, 나 그것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 최대의 난적, 불구대천의 원수 중력의 령. 여기서 나 아니면 너라는 분명한 양자택일 외의 애매한 선택은 없다고 니체는 강조한다. 그리고 중력의 령이 실체화된 난쟁이는 결코 자신의 심연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참고 견뎌내지도 못하기에 자신이 더 강한 존재라 선언한다.


니체의 이 세계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중력의 령-난쟁이의 길, 모든 것이 무거워지고 원한의식과 부정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으며 날아오르려는 존재들을 끌어내리려는 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니체- 차라투스트라의 길, 날아오를 듯 가벼워지면서 자기 자신을 긍정하며 대지의 모든 존재들이 자기 한계를 넘어 더 높은 존재가 되기 위해 웃으며 춤추는 길이다. 이 두가지 길이 '순간'에서 만나서 '영원'이라는 하나의 길로 뻗어간다면, 부정의 힘이 아니라 긍정의 힘이 당연히 우선한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긍정을, 삶을 원한다고.


허나 중력의 령-난쟁이는 이에 쉽게 굴하지 않는다. 난쟁이는 경멸조로 중얼거렸다. “곧바른 것이란 하나같이 속임수다. 진리는 하나같이 굽어 있으며 시간 자체도 일종의 둥근 고리다.” 난쟁이의 이 말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수수께끼같다. 대체 무슨 말일까? 이는 몇가지 예시를 들면 난쟁이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다.


바다의 지평선, 수평선이라고 불리는 풍경을 상상해보자. 대양에 나가면 인간의 시야에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그 끝은 하나의 곧은 수평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학생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지구가 둥근 것은 사실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인간적인 인식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사실 굽어있는 것을 곧바른 것이라고 착각하는게 아니냐고 난쟁이는 항의하는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시간도 우리는 늘 과거에서 미래로 직선적으로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건 인간이 자기의 기준대로 멋대로 그럴 거라고 정해놓은 것은 아닐까?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인간이 정한 기준일뿐, 하루살이 같은 동식물이나 또는 신과 같은 영원의 관점에서는 시간은 이전에 있던 일이 끝없이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하나의 둥근 고리와 다름없는게 아닐까?




신암행어사 문수의 난적 아지태는 바로 이 중력의 령-난쟁이처럼 인간이 정한 선과 악이니 진리와 거짓이니 하는 기준을 하얗게 지워버리려는 캐릭터이다. 그리고 사실 문수는 과거에 아지태를 자신의 부하로 두던 시절부터 아지태에 대해 뭔가 이상하다고,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낌새를 채고 있었다. 만다라케 침을 스스로 맞고 자신의 과거 속을 헤메던 문수는 과거 악수와의 마지막 결전날 아지태와 나눈 문답을 떠올린다. 만약 자신과 아지태가 적이 된다면 넌 자신이 옳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냐고...




"서로가 죽을 때까지 따분해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문수의 다소 뜬금없는 공격적인 질문에 아지태는 동문서답으로 대응한다. 문수는 분명 자기 입장의 정당함을 스스로 확신하냐고 물었는데 아지태는 확신에 대한 답이 아니라 누구 한명이 죽을 때까지 따분해질 일은 없을거라고, 즉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 될거라고 답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답을 내놓기 전 아지태는 자신의 세계관, 자신이 선과 악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 매우 친절히 설명해준다. 그야말로 니체의 중력의 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의 종이를 마주접은 것처럼 사실 선과 악은 하나다. 지극히 유약한 인간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을 자기의 잣대로 선과 악의 색깔을 정하지만 하늘에서 보면 그저 마주 접힌 종이에 불과하다... 결국 인간이 정한 선악따위 무의미하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인간을 위해서 악수를 퇴치하는 일이 선이라 믿는 장군 문수에게 사실상 이때부터 아지태는 선전포고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지태엔 선악의 구별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자기가 느끼는 재미, 즉 자신의 쾌락이다. 그렇기에 사실 자기 자신도 악수와 다름없는 존재인데도 재미를 위해 문수와 같이 인간을 위해 전쟁하는데 도움을 주고, 또 재미를 위해 쥬신을 멸망시키고 인간들을 공포앞에 무릎꿇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만화속 이야기가 아니라 재미와 쾌락을 위해서라면 선악따위 무의미하며 못하는 게 없는 현대인을 떠오르게 하지 않는가? ㅇㅂ같은 일부 쓰레기만 그렇지 자신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쉽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심지어 아지태는 자신은 인간을 정화할 것이며, 이게 더 좋은 세상인지는 자신이 알 바 아니지만 훨씬 재밌는 세상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게다가 그는 단 하루만에 국가의 수도를 파멸시킬 정도의 신과 같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초월적 존재에게 과연 진정으로 용기를 내서 대항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과연 문수는 죽음의 문턱에서 부활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기대를 거는 것처럼 아지태를 이길 수 있을까? 이긴다면 과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혹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꿈에서 본 것처럼 양치기가 뱀의 대가리를 물어뜯고 환하게 웃는 그러한 풍경을?


내일은 이 중력의 령에 대해 니체가 직접적으로 다룬 다른 구절들을 더 읽고 쥬신 국가의 종말과 아지태의 정체에 대해 좀더 깊이 해석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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