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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Aug 30.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39-신암행어사 리뷰5 아지태해모수

중력의 령은 어떻게 나라를 멸망시켰나


 

중력의 정령에 대하여 317-323p

 

1.

나의 입심, 그것은 민중의 것이다. 앙고라 토끼들이 듣기에 나 너무 투박하고 간절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말, 먹물을 뿜어대는 낙지나 글이나 끄적이는 여우들에게는 더욱 낯설게 들리리라.

나의 손, 바보의 손이다. 그러니 모든 책상과 벽, 그리고 아직 바보들이 덤벼들어 이리저리 꾸미고 낙서할 여백을 남겨두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 화 있을지어다!

나의 발, 그것은 말(馬)의 발이다. 이 발로 나 들판을 종횡으로, 나무 등걸과 돌멩이를 밟아가며 달리고, 질주할 때마다 미친 듯한 즐거움을 맛본다.

나의 위장, 독수리의 위장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어린 양의 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새의 위장임에는 틀림없다.

때묻지 않은 것을, 그것도 조금만 먹고, 하늘을 날, 날아가버릴 채비를 하고 초초해하고 있는, 나의 천성이 이러할진대 어찌 거기에 새의 천성이랄 것이 없겠는가!

나 무엇보다도 저 중력의 정령에 적의를 품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새의 천성이렷다. 진정, 불구대천의 적의와 최대의 적의 그리고 뿌리 깊은 적의를 말이다! 나의 적의가 일찍이 날아보지 않은 곳이, 길을 잃고 헤메어보지 않은 곳이 어디 있던가!

그것에 관해서라면 나 노래 하나를 부를 수도 있으리라. 그런 노래를 부르고도 싶다. 텅 빈 집에 나 홀로 있더라도, 그리하여 내 자신의 귀에 대고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또 다른, 청중이 가득해야 목이 부드러워지고 손이 사근사근해지며 눈이 또렷해지고 가슴이 열리는 그런 가수들도 있기는 하다. 나 그런 자들과 다르다.

 

2.

언젠가 사람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칠 자, 그가 경계석을 모두 옮겨 놓았으니. 그에게 있어 경계석들 자체가 모두 하늘로 날아갈 것이고, 그는 이 대지에게 “가벼운 것”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세례를 베풀 것이다.

타조는 가장 빠른 말보다도 더 빨리 달리지만, 그런 그도 아직은 머리를 무거운 대지 속에 무겁게 처박고 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도 이와 같다.

그런 자에게 있어 대지와 삶은 무겁다 일컬어진다. 중력의 정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한다. 나 이렇게 가르치는 바이다.

그렇다고 병약한 자와 중독된 자가 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자애라는 것조차도 그런 자들에게서는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다!

나 가르치노니, 자기 자신을 건전하며 건강한 사랑으로써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 자신을 참고 견뎌내기 위해, 그리고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방황은 “이웃사랑“이라는 세례명으로 자신에게 세례를 베푼다. 지금까지 자행된 것 가운데 가장 고약한 기만과 위선이 행해진 것이 바로 이웃사랑이라는 말 아래서였는데도 말이다. 그것도 온 세계에 무거운 짐이 되어온 자들에 의해.

그리고 진정,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고작 오늘과 내일을 위한 계명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기예 가운데서 가장 섬세하고 교묘하며, 궁극적인, 그리고 가장 큰 인내를 요구하는 기예인 것이다.

그러니까 소유물이 모두 그 소유자에게 잘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장되어 있는 일체의 보물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것이 가장 늦게 발굴되기 마련이다. 중력의 정령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 요람에 있을 무렵 사람들은 이미 우리에게 묵직한 말들과 가치들을 지참하도록 넣어주었다. “선”과 “악”이라 불리는 지참물을. 그런 것이 있기에 우리는 생존해도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제때에 그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불러 저들 곁으로 오도록 한다. 중력의 정령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지참물로 준 것을 굳은 어깨에 메고 충직하게 험한 산을 넘어간다! 우리가 땀을 흘리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다. 삶은 감당하기가 고된 것!”이라고.

그러나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감당하기가 고되다! 낯선 것을 너무나도 많이 어깨에 메고 가기 때문이다.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제대로 짐을 싣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억센, 짐을 무던히도 지는 사람은 낯선 무거운 말과 가치를 너무나도 많이 짊어진다. 그래서 삶이 황량한 사막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진정! 그 자신의 그 많은 소유물을 지고 가기에도 벅찬 터에! 게다가 사람의 내면에 있는 많은 것은 굴과 같다. 즉 역겹고 미끌미끌하며 좀처럼 잡히지가 않는다.

그 때문에 고귀한 장식으로 치장한 고귀한 껍질이 중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은 기예 역시 사람들은 익혀야 한다. 껍질과 아름다운 겉모습에 영리한 맹목을 갖추는 것 말이다!

다시 말하면 많은 껍질의 경우 볼폼없고 애처로우며 너무나도 껍질답기 때문에 사람 내면에 있는 많은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숨겨져 있는 많은 선의와 힘은 결코 드러나지 못할 수밖에. 더없이 맛있는 것이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인들, 더없이 섬세한 자들은 이 사실을 안다. 약간 살찐 몸매와 약간 마른 몸매, 오, 이 약간이란 것에 얼마나 많은 숙명이 깃들어 있는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혀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 자신에게 더없이 어렵다. 정신이 때때로 영혼에 대해 거짓말을 하니 말이다. 중력의 정령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선이요 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라면 이미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 된다. 그런 자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만인을 위한 선과 만인을 위한 악”운운해가며 지껄여대는 두더지와 난쟁이를 침묵시킨 바 있다.

...










/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말처럼 대지를 질주하고 새처럼 가볍게 세상을 날아다니는 삶. 차라투스트라가 꿈꾸는 이런 이상적인 삶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무겁게 만드는 중력의 령에게 적의를 품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새의 천성이다. 날개가 있는 존재에게 비행을 방해한다면 실로 생 자체를 걸고 투쟁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무겁고 힘겨운 것이라 여겨진다. 이런 인식이야말로 중력의 령이 원하는 것 자체이리라. 니체는 이런 무거움에서 벗어나 가벼워지기 위해선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설프게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며 위선적으로 이웃사랑을 한다며 타인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말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아끼고 스스로를 위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베풀며 노래하고 춤추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중력의 령은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끝없이 국가, 종교, 민족 등등 삶을 무거워지게 하는 가치들을 강조하며 이런 것들을 중요히 여기지 않으면 너는 선하지 않은 존재라고, 너는 악마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공동체에서 추방해버리겠다고 끝없이 우리의 내면에 속삭인다.


이렇게 이미 선과 악이 결정되어 있다면서 자신은 만인을 위한 선을 자행한다고 중력의 령은 외친다. 허나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선동에 속지 않는다. 선과 악을 빙자해 사실상 타인을 위한 노예의 도덕을 답습하라는 말을 받아치며 니체는 자신이 정한 선과 악을 내세우며, 이를 이후의 책 도덕의 계보학에서 이른바 주인의 도덕이라 이름짓는다.

이런 중력의 령의 사상은 신암행어사 작품에서 문수의 중력의 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아지태가, 왕 해모수의 대역을 하면서 본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과 관련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수가 전쟁후 서양으로 떠나고 왕 해모수도 떠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지태는 해모수를 대리하는 사이 원로원은 반역을 준비한다.



 평소 해모수가 천한 출신의 왕족이라는 점에 불만을 품은 원로원은 해모수의 부재를 틈타  반역을 일으킨다. 허나 왕 해모수를 대신해서 정무를 보던 아지태는 마치 자신이 바로 해모수인양 연기를 하고, 원로원은 의심하지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가짜라 단정한다. 그러자 아지태는 한마디 더 던진다. 애초부터 왕은 서양에 가지 않았고 숙청을 위해 모두를, 하늘마저 속인 것이라고...



아지태의 말처럼 인간은 어차피 자기가 믿고싶은 것을 믿는 존재다. 그리하여 원로원은 왕이 진짜든 가짜든 어차피 쿠데타를 감행했으니 원래 왕의 친위대인 각시부대를 동원하지만, 지난 전쟁에서 검기를 깨우친 원술의 무형검에 의해 결국 진압된다. 여기까지는 아직 원술도 아지태가 진짜 해모수를 연기한다고 생각하고 속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아지태가 의도한 대로 하나씩 진행되고 있었다. 따분하지 않고 더 재미난 아지태가 원하는 세상으로.




한편 전쟁후 쥬신의 장군을 그만두고 서양으로 계월향과 함께 외교겸 여행을 떠난 문수는  반역자로 몰려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불치병이라 생각했던 계월향의 병을 새크로피아라는 악마의 주술로 자신에게 옮겨 약해진 문수는, 서양에서 조용히 지내려고 했으나 쥬신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 왕의 칙명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비려막존. 아름답지 않으면 존재하지 말라는 한다는 왕명으로 쥬신에선 말도 안되는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는 지난 글에서 말한 것처럼 차라투스트하의 자기 긍정의 사상과는 반대편의, 질투와 혐오와 부정으로 가득찬 사상이 아닐 수 없다.




4년만에 서양에서 쥬신으로 돌아온 문수는 이런 미친 참상을 보고 크게 놀라 원술을 찾는다. 그러나 문수가 떠날 당시 기다리겠다고 굳게 말하던 원술은 날카로운 살기로 가득차 사람이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원술은 여전히 문수를 신뢰했고, 비려막존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더 구체적으로 진상을 말해주자 문수는 당장 아지태와 해모수를 찾고 필요하다면 진짜 반역이라도 하겠다고 결심한다.





죄를 범한자 가난한 자 귀족이 아닌 자들은 아름답지 않고 추하니 송두리째 말소하라는 이런 미친 명령을 어명이랍시고 그대로 수행한다니. 실로 2차 대전 당시의 나치 파시스트보다도 더한 정신나간 짓거리를 동방최대의 강국이라는 나라가, 그리고 어릴적 자신의 친구가 왕이 되어 이제는 전쟁도 끝났는데 학살을 저지르고 있으니 문수로선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심지어 원술이든 영실이든 애초에 해모수만 있었을 뿐, 아지태라는 사람이 있었는지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실을 안다고 확신하는 이는 문수 뿐. 결국 원술과 몇몇 군인의 협력을 받아 문수는 아지태 아니 해모수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해모수 또는 아지태는 문수에게 또다시 이전에 했던 문답처럼 원래 선과 악은 하나인데 인간이 멋대로 단정지을 뿐이라는 사상을 다시한번 설파한다. 그리고 문수에게 묻는다. 네가 보기엔 지금의 나는 아지태냐고 아니면 해모수냐고.



물론 거대한 아카시아처럼 뿌리깊은 나무인 문수는 이런 아지태의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 스스로 분명한 선악의 기준이 있는 문수는 쥬신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틀렸다고 한다해도 결코 자신의 확신을 쉽게 접지 않는다. 타인들이 선하다니까 선하다고 생각하는 노예의 도덕이 아니라 자신이 선과 악을 설정하는 주인의 도덕을 실천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말 한마디나 눈빛 한번이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엄청난 현실조작 능력을 가진 아지태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이 아까워서 공포에 떨며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인 영실은 조용히 아지태에게 묻는다. 대체 해모수는 어디로 갔냐고... 이에 어차피 왕실도 장악했겠다 난적인 문수도 거의 처리했으니 더이상 거칠게 없어진 아지태는 무서운 진실을 영실에게만 조용히 알려준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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