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포쟁이 뚱냥조커 Aug 31.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40-신암행어사 리뷰6 문수의 확신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주인의 도덕

중력의 령에 대하여 2


 
2.

언젠가 사람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칠 자, 그가 경계석을 모두 옮겨 놓았으니. 그에게 있어 경계석들 자체가 모두 하늘로 날아갈 것이고, 그는 이 대지에게 “가벼운 것”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세례를 베풀 것이다.

타조는 가장 빠른 말보다도 더 빨리 달리지만, 그런 그도 아직은 머리를 무거운 대지 속에 무겁게 처박고 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도 이와 같다.

그런 자에게 있어 대지와 삶은 무겁다 일컬어진다. 중력의 정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한다. 나 이렇게 가르치는 바이다.

그렇다고 병약한 자와 중독된 자가 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자애라는 것조차도 그런 자들에게서는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다!

나 가르치노니, 자기 자신을 건전하며 건강한 사랑으로써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 자신을 참고 견뎌내기 위해, 그리고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방황은 “이웃사랑“이라는 세례명으로 자신에게 세례를 베푼다. 지금까지 자행된 것 가운데 가장 고약한 기만과 위선이 행해진 것이 바로 이웃사랑이라는 말 아래서였는데도 말이다. 그것도 온 세계에 무거운 짐이 되어온 자들에 의해.

그리고 진정,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고작 오늘과 내일을 위한 계명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기예 가운데서 가장 섬세하고 교묘하며, 궁극적인, 그리고 가장 큰 인내를 요구하는 기예인 것이다.

그러니까 소유물이 모두 그 소유자에게 잘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장되어 있는 일체의 보물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것이 가장 늦게 발굴되기 마련이다. 중력의 정령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 요람에 있을 무렵 사람들은 이미 우리에게 묵직한 말들과 가치들을 지참하도록 넣어주었다. “선”과 “악”이라 불리는 지참물을. 그런 것이 있기에 우리는 생존해도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제때에 그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불러 저들 곁으로 오도록 한다. 중력의 정령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지참물로 준 것을 굳은 어깨에 메고 충직하게 험한 산을 넘어간다! 우리가 땀을 흘리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다. 삶은 감당하기가 고된 것!”이라고.

그러나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감당하기가 고되다! 낯선 것을 너무나도 많이 어깨에 메고 가기 때문이다.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제대로 짐을 싣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억센, 짐을 무던히도 지는 사람은 낯선 무거운 말과 가치를 너무나도 많이 짊어진다. 그래서 삶이 황량한 사막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진정! 그 자신의 그 많은 소유물을 지고 가기에도 벅찬 터에! 게다가 사람의 내면에 있는 많은 것은 굴과 같다. 즉 역겹고 미끌미끌하며 좀처럼 잡히지가 않는다.

그 때문에 고귀한 장식으로 치장한 고귀한 껍질이 중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은 기예 역시 사람들은 익혀야 한다. 껍질과 아름다운 겉모습에 영리한 맹목을 갖추는 것 말이다!

다시 말하면 많은 껍질의 경우 볼폼없고 애처로우며 너무나도 껍질답기 때문에 사람 내면에 있는 많은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숨겨져 있는 많은 선의와 힘은 결코 드러나지 못할 수밖에. 더없이 맛있는 것이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인들, 더없이 섬세한 자들은 이 사실을 안다. 약간 살찐 몸매와 약간 마른 몸매, 오, 이 약간이란 것에 얼마나 많은 숙명이 깃들어 있는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혀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 자신에게 더없이 어렵다. 정신이 때때로 영혼에 대해 거짓말을 하니 말이다. 중력의 정령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선이요 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라면 이미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 된다. 그런 자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만인을 위한 선과 만인을 위한 악”운운해가며 지껄여대는 두더지와 난쟁이를 침묵시킨 바 있다.

진정, 나는 온갖 것을 다 좋다고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이 세계조차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자들을 나는 매사에 만족해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을 맛있어할 줄 아는, 매사에 대한 만족, 이것이 최선의 취향은 아니다! 나는 “나”, “그렇다”와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반항적이며 까다로운 혀들 위장들을 높게 평가한다.

온갖 것을 다 씹어 소화하는 것은 돼지나 하는 일이다! 언제나 이-아 하고 말하기, 나귀와 나귀와 같은 정신을 가진 자만이 배워 익힌 것이다!

심원한 노랑과 작열하는 빨강, 나의 취향이 바라는 것들이다. 나의 취향은 모든 색에다 피를 섞는다. 자신의 집에 회칠을 하는 자는 회칠을 한 영혼을 드러낼 뿐이다.

어떤 사람은 미라를, 또다른 어떤 사람은 유령을 사모한다. 어느 쪽이든, 이런 자들은 모든 살과 피에 적의를 품는다. 오, 어느 쪽이든, 이 얼마나 내 취향에 거슬리는가! 나 피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가 침을 뱉고 토해내는 곳에서는 살고 싶지도 머물고 싶지도 않다. 이것이 나의 취향이니,나 차라리 도둑과 위증자 사이에서 살겠다.어느 누구도 입에 황금을 물고 있지 않으니.

더욱 역겨운 존재는 남의 침까지도 핥겠다는 자들 모두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발견 것 가운데서 더없이 역겨운 인간-짐승, 그것을 나 더부살이 짐승이라는 세례명으로 불러왔노라. 사랑은 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에 의해 살기를 원하고 있었으니.

사악한 짐승이 되느냐 아니면 사악한 조련사가 되느냐, 이것 말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 모두를 나, 복도 없다고 말한다. 나 이런 자들 가까이에 나의 오두막을 짓지 않으련다.

허구한 날 기다려야만 하는 자들도 나, 복도 없다고 말한다. 저들도 내 취향에 거슬린다. 세리, 소상인, 왕, 그 밖의 땅이나 지키고 가게나 지키는 모든 자들 말이다.

진정, 나 또한 기다리는 것을 배우기는 했다. 그것도 바탕에서부터. 그러나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서는 법, 걷는 법, 달리는 법, 도약하는 법, 기어오르는 법과 춤추는 법을 배웠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니, 언젠가 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서는 법, 걷는 법, 달리는 법, 기어오르는 법, 춤추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밧줄 사다리로 허다한 창문에 기어오르는 법을 배웠다. 나는 민첩한 발로 높은 돛대에 오르기도 했다. 깨달음의 높은 돛대에 올라 앉아있는 것, 내게는 적지 않은 복으로 보였다.

높은 돛대 위에서 자그마한 불꽃처럼 깜박이는 것. 비록 작은 빛이라 하더라도 표류하고 있는 뱃사람들이나 난파한 자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는 것이다!

나는 다양한 길과 방법으로 나의 진리에 이르렀다. 내가 사다리 하나만으로 먼 곳을 휘둘러볼 수 있는 이 높이에까지 오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 길을 묻고는 했지만, 그때마다 마지못해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는 것이 언제나 내 취향에 거슬렸으니! 그래서 나 차라리 직접 그 길들에게 물어가며 길을 가려 시도해보았던 것이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그리고 진정, 그같은 물음에 대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내 취향이렷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나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숨기지 않는 나의 취향 말이다.

“이것이 이제는 나의 길이다. 너희의 길은 어디 있지?”나는 내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이렇게 대꾸해왔다.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으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니체가 말하듯이 하나의 섬세한 기예다. 그것은 요즘 유행인 자존감 관련 에서 퍼뜨듯이 단지 하루에 산책 운동을 좀 하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는다고 해서 바로 익힐수 있는 쉬운 기예가 아니다. 이번 장의 후반부에서 니체는 바로 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걷는 법부터 나는 법까지 하나씩 말하며 중력의 령에 대항하는 법을 독자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는 상당부분 차라투스트라 1부 첫번째 장이었던 정신의 세 단계 변화- 낙타 사자 어린아이라는 단계에 대응하며 이를 좀더 자세히 풀어주는 야기 볼 수 있을 듯하다.


첫번째로 우리는 사막을 걷는 낙타처럼 삶의 무게를 견딘다. 허나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니체가 말하듯 실은 사람에겐 사람만이 감당하기에 고되다. 즉 사람만이 힘겹고 무거운 존재고 다른 것은 사실 악이니 마귀니 떠들어대도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다는 게 니체가 보는 과 고통의 진실이라는 이다. 우리도 흔히 직장생활은, 사회생활은 일이 고된 게 아니라 사람문제가 힘든 거라고 말하지 않던가. 그래서 니체는 이 고됨을 잘 견디기 위해 자기의 내면을 잘 표현하고 조정할 수 있도록 외양에 고귀한 장식을 갖추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마치 여인처럼.


두번째로 우리는 마치 '너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라며 선악의 기준을 강요하는 거대한 용에 대항하는 성난 사자처럼,'나는 이렇게 하고자 한다' 라고 나의 욕망과 나의 기준대로 선악과 취향을 결정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아무거나 대충 먹고 만족하는 자는 심하게 말해 개돼지에 불과한 것이다. 까다로운 혀를 지닌 자만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도 알 수 있으리라. 심지어 니체는 모든 색깔에 자신이 좋아하는 피의 색을 섞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렇게 과감히 자신의 취향, 자신의 기준을 표현한다면 그 과정에서 자기애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세번째 마지막 단계로 우리는 이제 걷는 법을 알았다면 어린아이처럼 날아다니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물론 우리는 신화에 나오는 천사처럼 날개가 달리지는 않았고, 사실 이 어린아이의 단계는 아직 차라투스트라조차 이르지 못했다. 다만 날아다니기 위해서는 먼저 가벼워져야만 하고, 내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는 춤추는 법을 익혀야만 한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문학적으로 비유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춤추는 법이란 당연히 티비에 나오는 아이돌 댄스를 똑같이 따라하는 그런 춤이 아니라 자신만의 리듬, 자신만의 흥, 자신만의 취향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런 기쁨의 춤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누구에게도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으며 숨길 필요도 없다. 나의 춤, 나의 취향. 나의 선악, 나라는 주인의 도덕...



신암행어사의 문수는 바로 이런 자신만의 기준, 취향, 선악의 기준이 확신으로 가득찬, 연인인 계월향의 표현대오 뿌리깊은 거대한 아카시아 나무같은 캐릭터다. 하지만 문수도 인간은 인간. 원술을 비롯해서 자신이 신뢰했던 모든 이들이 서양에 가기 전인 4년전과는 너무나 다르게 변해버렸고, 모두가 아지태라는 사람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고 조금 이상해진 왕 해모수 전하만이 있을 뿐이라 하자 그렇게나 뿌리깊은 문수도 아주 약간은 흔들린다.




하지만 아지태가 애초에 자신과 해모수는 하나인데 너희 인간이 멋대로 둘로 나눠서 보고 있었다는 술책을 부리자, 오려 문수는 흔들리던 자신의 관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애초에 자기가 알던 아지태는 해모수와 전혀 다른 인간이며, 다른 인간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문수 자신은 자신의 판단을 믿고 스스로를 따른다. 왜냐하면  문수는 악수와의 대전쟁에서 총사령관이라는 무거운, 너무나도 무거운 직책을 맡아봤으며, 그렇기에 그 누가 조언을 하더라도 결국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처럼 무거운 삶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문수도 단호하게 눈앞의 왕 해모수를 넌 결코 해모수가 아니라고, 넌 아지태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아지태가 해모수의 모습을 하고 있고, 게다가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말 한마디나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여버리는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니 대부분의, 아니 문수를 제외한 모든 쥬신의 인간은 그저 해모수에게 엎드리며 복종하기 바쁘다. 실로 이런 절대적인 의 공포 앞에서 초연하게 자기 신념을 지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허나 불가능에 가까운 바로 그 자기 신념을 굳건히 지켜는 문수만이 유일하게 아지태의 환술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전 글의 마지막에서 영실에게만 조용히 아지태가 밝혔듯이, 원래의 왕 해모수는 아지태가 처음 보자마자 먹어버렸다는 무서운 현실 진실이다...




아직 문수는 아지태가 해모수를 먹어치웠다는 진실까지는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그래서 이 거대한 용 같은, 신이나 다름없는 능력을 보이는 아지태 앞에서도 사자처럼 용맹히 달려들어 너는 가짜고 악인에 불과하다고 과감히 선언한다. 이렇게 자신을 쥬신의 왕 해모수로 인정하라는 절대적인 명령을 유일하게 거부한 인간 문수에게 아지태는 흥미를 느끼고, 왜 굳이 자신이 이런 짓을 벌이는지 자신의 목적에 대해 말해준다... 재미. 잘 쌓은 성벽도 밑에 돌 몇개만 빼면 와르르 무너지는데, 그러면 또 쌓을 수 있고 그게 재미있다고. 물론 무너지는 것 자체도 아지태에겐 재미있는 일이겠지만. 마치 니체의 적수 중력의 령에게 인간사의 선악 따위가 다 무의미하듯이 아지태는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웃으며 말한다.




쥬신 국가와 사람들을 자기 재미를 위한 장난감 취급하는 아지태. 이에 분노한 문수는 더이상 앞뒤 잴것없이 곧바로 아지태를 공격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신과 같은 능력의 아지태에게 최초로 타격을 주고, 아지태는 자신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에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매우 당황하며 흔들린다. 이제, 문수가 만다라케 침으로 인한 과거의 환각에서 슬슬 다시 깨어날 시간이 다가온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39-신암행어사 리뷰5 아지태해모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