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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미 Feb 19. 2021

나의 영화로운 순간

취미로만 영화를 보던 시절, 설렘을 다시 꺼내 보고 싶어서

생각해보면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것 같다.

입이 짧았던 나를 어르고 달래며 밥을 먹일 때면 엄마는 비디오테이프부터 찾았다. 노란색 몸체에 초록색 테두리 ‘라이온 킹’ 테이프는 어린 시절 늠름한 밥 동무였고, 생애 처음 극장에서 ‘미녀와 야수’를 보고 한동안 이불을 드레스 삼아 몸에 휘감고 다녔던 기억이나, '쉬리’ 속 키싱구라미를 사달라며 종일 졸라댔던 기억, 가족들과 저녁 산책 나갈 때마다 들렀던 시내 비디오 대여점의 풍경은 여전히 생생하다.


주로 고전 명작들을 엄선해 틀어줬던 KBS 명화극장이나 MBC 주말의 명화, EBS 토요 명화 같은 프로그램도 어린 나이에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던 고마운 통로였다. 아침이면 신문 TV 편성표 페이지부터 들춰 짤막하게 실린 영화 소개란을 읽고 형광펜으로 표시해뒀다가 챙겨보곤 했다. ‘인생은 아름다워’ ‘시네마 천국’ ‘쇼생크 탈출’ 같은 연륜 있는 영화들은 소화하기 어려웠지만 ‘다이하드’ ‘007’ 시리즈 같은 오락 영화는 전자레인지로 튀겨낸 팝콘을 소화하며 오빠와 나란히 깔깔대던 기억이 난다.


고2 때였던가. ‘웨딩 싱어’와 ‘빅 대디’를 보고 좋아했던 배우 아담 샌들러의 영화가 개봉했다는 기사를 보고 친구들과 야자를 째고 극장에 갔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펀치 드렁크 러브’. 

좌측 스틸로 로맨스를, 우측 스틸로 코미디를 기대했더랬다. 물론 지금은 사랑하는 영화! (출처: 네이버)

본 사람은 아마 짐작할 수 있겠지만 아담 샌들러가 기존에 보여왔던 코미디와는 영 거리가 있는 영화다. 주인공이 거리에서 풍금을 주워 온 순간 ‘아 이제 본격적인 코미디를 보여주겠군!’ 기대하며 자리를 고쳐 앉았던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대체 무슨 얘기야?’하는 양옆 친구들의 귓속말만 새로고침해야 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당시 포스터에 큼지막하게 적혀있던 홍보 카피는 ‘올해 가장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였다. 

지금 찾아보니 당시 카피는 '아주 특별한 로맨틱 코미디'. '아주'에 방점이 찍혀있을 줄은 미처 몰랐네. (출처: 네이버)

지금은 물론 일부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야자까지 째가며 매콤한 자극을 원했던 10대 고딩들에게는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무미한 자극이었던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친구들의 눈총을 받으며 매콤한 떡볶이를 씹었지만, 그날 나는 뭔가 좀 다른 걸 본 것 같아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대학교는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지만 웬걸, 대학생 때 영화를 참 많이도 봤다. 씨네21과 현재는 폐간된 무비위크, 필름 2.0 영화지를 구독하며 그 주의 개봉작과 리뷰를 훑고, 수강 신청보다 더 치열하게 영화제 티켓팅을 하고, 앉은 자리에서 서너 편을 연달아 보기도 했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이라던가 누군지도 모르는 유력 평론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영화 리스트라던가. 아무튼 각종 리스트에 빼곡히 적힌 영화들을 마치 과제를 해나가듯 닥치는 대로 보고, 읽고, 적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과제였는데 누가 시키지 않아서 즐기며 해나갈 수 있었다. 주변 친구들에 비하면 월등한 씨네필(영화 팬)이었지만, 흔히 취미를 물으면 영화 감상이라고 답하는 수준일 거라 짐작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영화를 취미 외에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사회복지학과는 졸업 전 두 번의 현장 실습이 필수였는데, 안타깝게도 두 번의 현장 모두 이 전도유망(?)한 예비 학교사회복지사에게 그럴듯한 희망을 심어주지 못했다. 이론과 현장의 괴리를 알게 된 나는 무작정 휴학을 했다. 이대로 졸업을 해버리면 나도 똑같은 직업인이 될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다음 단계를 위한 반년의 유예가 필요했다.


무계획으로 휴학했지만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아침이면 하릴없이 집 앞 과천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날도 도서관 공원 벤치에 앉아 귤 까먹으며 씨네21 페이지를 넘기다 서울독립영화제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그저 단순히 개봉 전 영화를 먼저 보고 싶어서 지원했는데 막상 영화보다 사람들과 영화로 얘기하는 게 더 좋았다. 앞서 실습 현장에서 봤던 이들과는 달리 정말 이 일 자체가 좋아서 하는 사람들 특유의 반짝거림이 있었다. 덩달아 반짝이고 싶어서 영화제가 끝난 후에도 사무국 언니들을 쫓아 관객 에디터라는 역할로 ‘인디스페이스’라는 독립영화 전용관의 소식지를 만들었다.


복학했지만 더는 어떤 주제도 영화로 대화하는 것만큼 재미있진 않았다. 그 무렵 우연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라는 영화를 봤다. 여운이 길어 한참을 앓았다.

엄마의 잔인한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출처: 네이버)

그 영화에 지분은 없었지만 이렇게 좋은 영화를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주변에 좋은 영화를 더 보여주고 싶어서, 처음 영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그 영화를 봤던 극장 ‘스폰지하우스’를 운영하던 수입사의 구인 공고를 봤다. ‘수입 영화 마케팅팀 신입 0명’. 

그렇게 나는 영화계에 입사했다.


‘역전’. 단어를 읽는 것만으로도 괜히 두둥!하며 머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극적인 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지금껏 내게 그런 역전의 순간이 있었나, 갸웃대다 국어사전을 검색해봤다. ‘형세가 뒤집힘 또는 형세를 뒤집음’. 일이 되어가는 상태를 대하는 수동과 능동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내 경우는 능동이다. 현 상황을 되짚어보고 한번 뒤집어 보는 것. 사회복지를 공부했지만 영화 일을 하고 있는 것. 업계 안에서도 수입사~홍보마케팅사~배우 매니지먼트사 그리고 지금의 제작사까지, 현재의 방향타를 점검하고 이리저리 조금씩 바꿔보며 맞춰가는 것. 언젠가 찾아올 또 다른 역전의 순간에도 능동이기를, 기대하며 기다려본다.


/ from 에세이드라이브 글감 '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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