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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미 Feb 19. 2021

스마일이 끈적일 때마다

산뜻한척하지만 자주 끈적거려요

약 3년 전, 그러니까 세 번째 퇴사를 고민하던 때.

사무실 책상 위 달력에는 크고 작은 스마일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종일 없는 말만 골라 해야 했던 행사나 아저씨 기자와의 저녁 미팅 같은,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날에 붙여둔 스마일은 나만의 ‘오늘도 무사히’ 부적 같은 거였다. 그럼에도 영 버거운 일정이 생기거나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휴가가 밀릴 때면 스마일에 눈물을 그려 넣곤 했는데, 달을 넘길수록 우는 스마일을 보는 날도 잦아졌다. 그렇게 세 묶음짜리 스마일 스티커가 울보로 젖어갈 무렵, 나는 퇴사를 했다.


근 반년을 고민했던 것치곤 간명한 퇴사였다. 붙잡아주셨지만 시나리오를 공부하겠다며 덜컥 끊어버린 학원 수강증이 그럴듯한 핑계가 되어주었다. 돌연 공부를, 아니 그것도 시나리오 공부를 하겠다며 퇴사한다는 말에 대부분 응원과 축하를 보내줬지만, 일부는 걱정인지 질투인지 아니면 정말 아무 말이었는지 모를 뾰족한 말들을 굳이 보태기도 했다.

뭐, 이해는 됐다. 남들은 안정을 다져가는 30대 초반에 자진한 퇴사였으니까. 그래도 궁금했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하는 영화 한 편을 써볼 수 있을지, 어쩌면 내게 있을지도 모를 가능성도 더 늦기 전에 시험해보고 싶었다.


엄중한 노트북들 사이에서 홀로 노트와 연필을 챙겨갔던 첫날, 만학도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오랜만에 잡아본 필기에 손아귀가 저릿했지만, 머릿속 어딘가는 개운해졌다. 잔뜩 웅크려있던 뇌 주름들이 쭉쭉 스트레칭하는 느낌이랄까?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뇌 주름이 펴지면 기억력과 인지력이 현저히 줄어든다고! 이런!) 아무래도 다음 수업부터는 머리만 스트레칭하고 싶어서 노트북을 챙겨갔다. 딱히 젊어 보이려던 것은 아니고가끔 스트레칭이 엉킬 때마다 보려고 귀여운 스티커도 서너 개 붙여두었는데개중에는 물론 스마일도 있었다.


이번 스마일은 꽤 효험이 있었던지, 내내 즐거웠다. 혼자 서있던 내 곁에 같은 방향으로 발맞춰 동행하는 이들이 있어 든든했다. 스무 명 남짓의 동기들은 나이대도, 직업도 제각각 달랐지만, 우리가 영화 안에서 나누는 온도는 같았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눈빛은 어쩜 그리도 반짝거리는지! 숨 가쁜 열정에 홍조 띤 얼굴들과 마주볼 때면 가슴 뛰는 날이 많았다. 세상에 없는 아이템을 찾겠다며 잡히는 대로 보고, 읽고, 답사를 떠나거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누구를 살릴지 죽일지 그렇다면 어떻게 죽일지 격렬하게 토론하다 막차를 놓치기도 했다. 그러다 처음 시나리오로 상을 받아보기도, 연하와 연애해보기도 하다가 1년이 지났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스티커 같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굳이 붙이지 않아도 기능하는 데는 아무 지장도 없고, 어쩌면 쓸모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작은 흔적만으로 주변을 환기하고 개성을 더해주는, 알록달록한 시간.


그 알록달록한 유예가 끝난 후, 반짝이는 동기들을 뒤로하고 나는 현실로 복귀했다. 그 1년 덕에 줄곧 바라던 영화 기획제작 일을 하고 있으니 원상복귀가 아님에 안도하다가도 종종 떼어낸 자국을 매만져본다. 꾸준히 자신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동기들을 볼 때마다 그 자국도 덩달아 끈적인다. 그럴 때마다 맹숭한 회사 노트북은 덮어두고 스티커들로 빼곡한 내 노트북을 열어 끄적여보곤 한다. 

나도 여전히 끈적거리고 싶어서.


/ from 에세이드라이브 글감 '스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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