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유와의 첫 날을 회상하며,
후둑. 후둑.. 하더니 후두두둑... 단풍 비가 내린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경쾌한 리듬에 맞춰 머리를 이리저리 좌우로 스트레칭하며 부엌 창문을 연다. 청명한 공기가 얼굴에 스민다. "아, 이제 정말 겨울인가 봐." 창문에 김이 서려 일렁인다. 뿌연 수증기 속에 눈을 반쯤 열어 냄비 속을 살핀다. 유튜버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껍질을 제거하고 우유에 재어 잡내를 착실히 벗겨낸 닭이 익어가고 있다. 다음엔 뭐였더라..?
'보양식 황태 삼계탕 만들기' 영상을 재생한다. 물에 불려 한결 나긋해진 황태 가시를 하나, 둘 발라내다가 오래된 습관처럼 뒤를 돌아본다. 쌕쌕이며 자고 있는 크림색 강아지, 두유. 작고 소듕한 우리 강쥐...
그렇다. 2020년 11월 21일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두유와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처음 두유를 본 건 한 유기동물 구조 보호 단체(행동하는 동물 사랑)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였다.
같이 사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곳이었는데, 나는 귀여운 아이들과 통 어울리지 않는 안타까운 사연에 흑흑 대면서도 그저 조용히 하트 누르는 정도의 용기만 가졌던 1인이었다. 그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민들레 홀씨 같은 하얀 털에 까만 코, 토끼 귀... 세상에. 어쩜 넌 이름도 두유니. 이런,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두유는 외모만으로도 시선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지만, 겁이 많고 장거리에는 차멀미를 한다는 메모에 나는 마음이 더 끌렸다. 데려오자, 하면 무조건 만만세 대찬성일 친구 몰래 화면만 쓰다듬어 보기를 며칠. 맥주 한 캔에 그만 나의 짝사랑을 실토했고 그날 새벽, 우리는 입양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날, 친구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모든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한 듯한 질문들을 의기양양 통과해낸 친구는 내 번호를 넘겼다. 이제 패가 내게로 넘어온 것이다. 그날부터 낯선 번호가 울려주기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 예상 질문과 답안까지 정리해 곱씹어 연습해보던 어느 날, 드디어 12일 만에 그 번호가 떴다.
“안녕하세요, 행동사(행동하는 동물 사랑)입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 “괜찮습니다! 두유 사진 보면서 기다렸어요!”
"두유가 대형견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아시죠?"
- "네! 집이 좁아서 걱정이긴 한데 자주 산책하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친구끼리 강아지 키우다 싸우고 파양하는 케이스 많이 봤어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 "네네! 저희 10년지긴데 한 번도 싸운 적 없어요! 혹 무슨 일(천재지변 혹은 결혼)이 생기더라도 둘 중 한 명이 두유 끝까지 책임질 거에요!"
"하하.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요?"
- "네네네! 두유가 와준다면 더 돈독해질 것 같습니다! 정말 사랑해줄 자신 있습니다! 담당자님 제발 믿어주세요~~!!"
지금껏 이렇게 애걸했던 면접이 있었나. 눈앞에 계신다면 구애의 춤이라고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갓 입대한 이병처럼 모든 음절마다 힘주어 말하느라 녹초가 되었지만 뭐랄까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마침내 근 한 달 만에 우리의 돈독한 친구, 두유의 입양이 확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잔가시까지 모조리 발라버린 황태를 잘게 찢어 찰박찰박 헹군다. 끓는 냄비에 넣고 휘적휘적. 피어오르는 김이 부엌에 구수한 온기를 퍼트린다.
고백하자면 나는 강아지를 무서워했다. 아니 지금도 솔직히 ‘조금’ 무서워하니 과거형은 섣부르지. 더 정확히는 요크셔테리어 종이 ‘조금’ 무섭다. 때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어난 참사였다. 두둥.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다만 뜀박질을 좋아하는 어린이였던 나는 그날도 피아노 학원까지 뛰어갔고, 하필이면 그 옆에 목줄 풀린 요크셔가 있었던 것뿐이다. 일단 뛰면 같이 놀자는 신호로 인지한다는 것을 몰랐던 이 가련한 어린이는 맹렬히 짖으며 뒤쫓는 요크셔를 피해 온 동네를 뛰고 뛰다 필사적으로 대형 쓰레기통 위로 기어 올라가 살았다. 아마도 생애 처음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때가 아닐까. 그래도 덕분에 자전거를 배웠다.
당근 한 개를 씻어 쫑쫑쫑. 입 크기에 맞는 앙증 사이즈로 썰어낸다. 아, 이번에 당근마켓도 처음 이용해봤다. 집에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신금호역에서 켄넬(이동장)을 사 오던 날,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명명 '강쥐월드'.
그날 뿌듯하게 첫 거래를 마친 나는 대형 켄넬을 손에 든 채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 골목을 돌아오는 택시를 보며 혹시 모를 뾰족한 말과 시선을 방어하고자 켄넬을 품에 꼭 안았는데 이게 웬걸. 그것이 강쥐월드의 시작이었다. 택시 기사님은 강쥐월드의 열렬한 집사셨고, 내가 켄넬을 세로로 안은 순간 그 안에 강쥐가 없다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하신 눈치였다. 차에 타자마자 기사님은
“근데 강아지는 왜 없어? 병원 갔다 오나?”
- “아, 이거 사러 왔어요.”
“뭐?? 강아지를 사러 왔다고???”
분명 운전 중이셨는데도 고개를 홱 돌려 날 쳐다보셨다. 어쩐지 나 자신이 강아지 공장 공장장이 된 것만 같아 그냥 죄송했다.
- “아 아뇨;; 제가 유기견을 급하게 입양해서 이게 필요했거든요.. 어 강아지 이동장. 이거 중고로 사러 왔어요...”
초3 이후 다시 한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구구절절 덧붙였더니 그제야 “아이구 유기견을 입양했어~?” 온화한 미소와 운전 실력을 보여주셨다. 그 후 기사님이 모시는 시츄 ‘민돌’ 군은 집안의 사랑 받는 막내라는 걸 알았고, 공원 산책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계시는 사진도 몇 장 보았다.
지하철에서는 가장 맨 끝 승강장에 탄 덕에 노약자석에 계셨던 강쥐월드 최고참 어르신들의 가르침을 듬뿍 하사받았다. 호의에 찬 눈빛으로 켄넬 안을 들여다보시고선 싸게 잘 샀다며 칭찬해주시던 할머니와 강아지 예방접종 시기를 일러주신 아저씨. 그날 내가 경험한 강쥐월드 안에선 모두가 서로를 살피고 말을 건네고 보탰다. 그저 켄넬 하나 들었을 뿐인데 연대가 생겨버린 것이다.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고 따뜻한 곳으로 보였다. 이렇게 또 나만 몰랐던 세계가 있었구나. 그렇게 또 나의 세계가 한 단계 넓어졌다.
한 시간을 팔팔 삶은 닭의 뼈와 살을 발라낸다. “아주 정성이다.” 친구 말에 그러게. 내가 이런 정성은 남자친구에게도, 하물며 부모님께도 해준 역사가 없는데. 그래서 언제 말하지... 뼈에 붙은 살들을 뜯어내며 골똘. 부모님껜 아직 말하지 못했다. 본가의 재건축이 얼마 전 완공된 후 부모님은 자연스럽게 내가 다시 들어올 거라 믿고 있다. 와중에 강아지를 입양했다고 하면... 음. 어떤 답을 알면서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끓인다. 닭 살코기와 황태, 당근을 한데 넣어 보글보글. 걱정도, 기대도, 바람도, 한 덩어리로 뭉근하게 끓어오른다.
두유가 깼다. 가족이 된 첫날, 적응하기에도 벅찰 텐데 중성화 수술까지 마친 기특한 녀석. 살피느라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눈꼬리와 축 처진 꼬리를 보니 찡하다. 이때다 싶어 한 김 식힌 보양식을 건네본다.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시식의 순간.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바로 달려들 줄 알았더니, 사방팔방 눈치를 본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조심스레 다가와 과연 내가 먹어도 되는 음식인지 아닌지 탐지해본다. 킁킁 낼름하더니 이내 멀찍이 떨어진 바닥에 벌러덩.
그래. 우리 천천히 사귀어보자. 서두르지 말자.
창문 너머를 본다. 서름한 가지에 볕이 들고 꽃봉오리가 차오를 때, 나는 두유와 우리의 시간을 걸을 것이다.
*두유 인스타그램 @i_love_doyou
/ from 에세이스탠드 글감 '국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