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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l 18. 2022

골드 파인애플 주스를 선물 받은 날

알듯 말듯한 우정


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방수가 안 되는 운동화가 흠뻑 젖어 들어갈 무렵, 그 애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어디쯤이냐고 묻는 목소리. 지금 네가 말한 식당 안에 막 들어서려 한다고, 그런데 식당 내부에 있어야 할 네 모습이 안 보인다고 대답했다. 잠깐의 침묵. 그 애는 이내 짜증스럽지만 탓하는 건 아닌 듯한 말투로 이런 말을 했다.


- xx문구 쪽에서 출발한 거면 식당 후문에 있어야 할 거 아냐. 왜 정문 쪽에 있어? 난 앞에서 너 기다리려고 정문에서 일부러 후문까지 돌아왔구만.


앗. 서로 길이 엇갈렸다는 것 그 말을 고서 알게 되었다. 나도 그렇고 걔도 그렇고, 서로 상대가 출발한 지점에서 목적지를 찾다 보니 쓸데없이 한 블록씩을 돌아 결국 엇갈리게 된 것이었다.


그 애가 오는 방향에서 기다리려고 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헛수고가 되어버렸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허탈한 기분이 들진 않았다. 외려 기분이 좋았다. 일단 나는, 몇 년 만에 만났으니 먼저 들어가 앉아있기보단 걔가 오는 쪽에서 반겨주려고 그런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화 통화를 해보니, 그 애 내가 오는 쪽에서 나를 기다리려고 한 바퀴를  모양이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놓쳤다. 어떻게 보면 웃기고 사소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사소하게라도 누가 나를 생각해서 행동해주었다는 이 기뻤다.


주문한 닭갈비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고 나서 예고생인 그 애는 부산스럽게,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참여했던 연주 발표회에서의 썰을 풀기 시작했다. 자기 앞 순번에 연주했던 남학생의 키가 너무나도 컸어서 그 애가 연주하고 남겨둔 마림바가 자신의 차례에 왔을 때엔 이미 저 천장에 닿을 것처럼 높이 세팅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악기를 본인의 키에 맞게 세팅하느라 초반부터 엄청나게 긴장을 해서 억울하다고, 악기를 연주하는 데 있어 심리적 안정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손짓 발짓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웃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썰이 담고 있 것이 그 애의 우스꽝스러운 상황 묘사뿐이었던 건 아닌 것 같다. 그 애의 말투나 표정, 과장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웃음부터 나올 상황이긴 했지만, 나는  이야기가 무대를 향한 그 애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그만의 확고한 무대 철학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평생 동안 알게 되는 것은 나의 친구이자 동료인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아주 일부일 뿐이겠지만 그럼에도 이 친구처럼 순간순간에, 누군가 자기 삶의 흔적을 일부나마 내게 보여주려고 할 때면 나는 그로부터 가족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동질감일까? 아니면 소속감? 아니면 의미를 풀어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 내 삶 속에 나의 경험과 생각들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는 것처럼, 그에게도 그런 생생한 축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 들어 도 모르게 생기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 그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내게 들려줄 때면, 나는 가끔 알게 모르게 비슷한 경험을 했던 나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렇게 나는 그가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을 하면서, 지금 그와 내가 같은 세상에서 이토록 다르, 그렇지만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을 실감하게 된다.


그날의 디저트는 골드 파인애플 주스였다. 그 애를 따라 무작정 방문한 카페에서 그 애에게 추천받은 음료인데, 어디서 먹어보긴 한듯한, 그러나 정체 모를 물렁한 식감과 달짝지근한 시럽 때문에 낯섦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딱 그 애를 생각나게 하는 음료였다. 내게 익숙한 나의 삶을 재조명하게 하면서도, 또 새롭고 낯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그날의 골드 파인애플 주스는 시원하고 상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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