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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Dec 08. 2022

시니컬한 낭만주의자의 인간관계론

Might I be the one I am looking for?


 나는 줄곧 섬세한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아왔다.

여기서 더 욕심을 내자면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만큼의 섬세함을 발휘해 줄 수 있다는 것 정도.


 나는 내가 무언가를 안다고 표현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아둬야 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글을 쓴다. 나는 나의 이상형을 죽었다 깨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내가 바라는 만큼의 절대적인 관심과 사랑을 주고받는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세상에서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밖에 없는 것 같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길,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평생에 걸친 로맨스의 시작이라 한다.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 그건 너무 1차원적이다. 나는 내가 꿈꾸던 완벽한 로맨스, 평생에 걸친 맹목적인 로맨스의 실현을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편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온전히 믿고, 보듬어주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게 있어 타인이 나만큼이나 소중해질 수 있을까? 반대로 타인에게 있어 내가 그만큼이나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내가 아닌 타인을 나보다 더 사랑하게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쯤 되니 글이 너무 냉소적으로 삐딱선을 타는 것 같아 보여서 첨언하자면, 나는 내가 낭만주의자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다. 다만 낭만 속에 빠져 지내려면 현실에 대한 이해도 어느 정도 동반되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맹목적인 사랑만을 기대하는 건 낭만주의자 중에서도 하수다.


 그렇지만 나도 한때는 맹목적인 사랑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그것을 시험해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까지 심오한 사랑을 시험해 볼 상대가 달리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그것을 달라고 요구해보기도 했다.


 비록 좌절된 바람이 되어버렸지만, 그때의 나는 다른 사람들이 글 등의 수단을 통해 묘사하는 것처럼 부모님과 깊은 유대감이 있는 관계를 형성하길 원했다.


 교과서적인 그들의 글을 읽을 때면, 나도 나의 이 고유한 삶은 모두 부모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것이었다든가, 그때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함께했던 추억이 지금까지도 매우 큰 의미로 남아 있어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든가 하는 내용의 글을 쓰고 싶었다. 내가 굳이 그 이야기들을 글로 남기지 않더라도, 부모님과 나 사이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감정의 교류가 존재했고, 그만큼 깊은 여운을 느낄 일이 많았다는 사실에 스스로 감격하고 싶었다. 자아도취적인 것 같기는 해도, 부모님과 내가 맺은 참으로 소중한 관계를 떠올릴 때마다 이보다 어떻게 더 완벽한 관계가 존재할까 하는 여운에 흠뻑 취해있고 싶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부모님들과 그런 관계를 맺는 것에 실패했다. 장렬하게(웃음).


 살면서 내가 만났거나 만나게 될 수많은 타인들이 있겠지만, 그 모든 타인 중에서도 그들의 앞에 나를 완전히 내려놓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타인은 가족, 특히 부모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부모님과 만큼은 내가 원할 때마다 의지할 수 있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며, 지지를 구할 수도 있는 그런 이상적인 관계가 되길 바랐다. 그 모든 일들이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서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던 여러 가지 글과 영상 매체들이 하던 일을 우리 부모님께 요구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도서관에 방문하거나 클릭 몇 번만 하면 얻어지는 적재적소의 공감과 위로, 그리고 현명한 조언. 다른 수단을 통해서라면 가능하겠지만 사람으로서는 사람에게 바로바로 내어 줄 수가 없는 것들...

 
 부모님과 ‘서로 언제든 기댈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비록 낭만적인 감수성 아래에서 비롯된 것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사실 답정너였던 것이다. (답정너 :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답만 하면 돼'의 줄임말, 청자를 화자의 입맛에 맞는 의견만 내야 할 꼭두각시나 기계로 취급하는 사람, 나무위키)

 그 모순을 실감하게 되고부터 부모님께는 그냥 적당히 바라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뿐만이 아니라, 내가 맺은 타인과의 모든 관계에서는 그냥 그 정도의 거리감만 두고 있으면 되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정신적 충만감은 나의 정체성과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관계 자체가 아닌 관계 사이의 소통, 그중에서도 아주 일부의 소통을 통해서만 가끔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부/모녀 관계, 친구 관계, 연인 관계, 그리고 그 외의 무수한 관계들은 내가 좋아하는 인상적인 기억과 여운만을 남기며 나 좋은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욕심을 낼 수도 없을뿐더러, 낸다고 해서 뭔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과 함께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기억 속에 오래 간직될 만큼 깊은 여운으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이만하면 충분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바라는 게 많아지는 때일수록 누군가에게 과하게 의지하지 않도록 스스로 자제하는 능력이었다. 세상에 내가 아닌 어느 누가 내게 영혼이 통하는 기쁨을 안겨줄 수 있겠는가? 이제는 지나치게 낭만주의적인 착각에서 벗어나 타인이 나를 정서적으로 완전히 만족시켜 주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


 마침내 내게, 타인과 나의 사랑이 아닌 나와 나의 사랑, 그것의 의미에 대해 집중해 볼 시간이 주어진 것 같다. 주제에 어울리는 인용절로 글을 마친다.




Might I be the one I am looking for?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는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 Natalie Clifford Ba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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