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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r 09. 2022

_220309_최종. hwp

과연 최종일까?

1.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새 학기를 이 삼일 남짓 남겨두고 이제는 대하는 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골칫덩어리가 오랜만에 나를 찾아왔다. 이 골칫덩어리는 학창 시절 내내 성가시게 나를 따라다니며, 어느 날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또 어느 날에는 갑자기 나타나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입시에 대한 의무감은 언제 어느 때고 찾아와 온갖 사사로운 생각들 사이에 나를 가두어 놓곤 했다. 잘 지내고 있던 나를 갑자기 멈춰 세워 불안에 떨게 하는 그 생각들이란 대체로 주변에서 들은 말들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런 말들은 세상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어른들의 말이라는 점에서 어떨 때는 내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과 주위 어른들로부터 들은 말들을 다시 정리해봤다.      

고3의 '시간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남들의 '최선'에 나의 최선을 맞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많은 친구들이 이제는 습관처럼 아무런 생각도, 불만도 없이 그 긴 시간을 입시를 위해 투자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래야만 한다.


 사사로운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근원인 이 말들을 곱씹다 보면 사회가 요구하는 만큼 절박하게 살아가지 않는 나와 그런 나의 인생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대입의 성공과 대입의 실패. 이 중에서 내가 속하게 될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사람들이 이미 수험생의 앞날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버렸는데 여기에 내 자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러다가 진짜로 흔들리게 된다. 그래도 이왕이면 대학은 잘 가야 하지 않나? 지금은 고3이니까 앞서 선생님들이 얘기하신 그런 생활과 마음가짐을 따르는 게 올바른 일 아닌가?


 평소에는 대입의 결과로 학창 시절을 구분 짓는 이분법적 세계관의 너머를 보겠다는 태도로 크게 공부에 매달리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 짓눌릴 때마다, 나는 내가 무조건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데 고를 답안은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이왕이면 그 답안에 맞춘 삶을 살아가라는 압박 속에 놓이는 것 같다.


 이미 공라밸(공부와 삶의 균형)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와 각오를 단단히 다졌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입시만 생각했다 하면 항상 '더, 더 해야만 한다'라는 식의 당위적 사고를 하게 되는 내가 싫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그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도 이제는 좀 지긋지긋했다. 이제껏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던 모든 고민들이 다시 처음의 지점으로 되돌아가 끊임없이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서 내가 스스로 내린 결론에 대해 이미 몇 번째인지도 모를 재판결이 이루어지려고 하면 생각했다. 혹여나 내가 내린 결정에 내가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닌지, 선택을 하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이득과 손실에 대해 아직 미련을 거두지 못한 것은 아닌지. 내 안의 불안은 곧 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사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그런 마음 상태였다. 내게 답을 정해주려는 대입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외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깎아먹게 했다.



2.

 항상 이놈의 좋은 대학이라는 게 문제다. '좋은'이라는, 정말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이 하나의 수식어 때문에 앞으로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도통 갈피를 못 잡는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내가 대학에게 바라는 것들은 명확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전공에 대한 유익하고 흥미로운 공부를 할 수 있고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개성적인 친구들과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해주는 해외연수, 진로체험, 인턴쉽, 및 각종 대회와 활동들에 수월하게 참여할 수 있으면 된다.

 

 내가 바라는 것들을 얼마나 ‘좋은 수준’으로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은 없으므로 내게 이 모든 것들을 누리는 데 있어선 서울의 명문대와 지방대 사이에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 추측한다. 어느 대학에서든 훌륭한 교수님들이 강의를 해주실 것이고, 만나는 친구들에게도 제각각의 특색이 있을 것이며, 학교에 따라 지원해주는 활동들이 다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더러 이왕이면 명문대에 가라는 어른들의 조언을 무시할 순 없다. 왜냐하면, 명문대와 지방대 사이에는 분명한 ‘질’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당연한 소리를 갑자기 왜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미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도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정확히는 그 질적 차이가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도 이 세상이 질적 차이로 나눠진다는 말의 '의미'를 중학생 때부터 알고 있긴 했다. 다니던 수학학원의 철두철미하신 원장 선생님이 ‘라면 먹고 배부른 것과 스테이크 먹고 배부른 것의 차이’에 대해 세미나에서 몇 번이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심 많던 그 시절의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 대학이든 뭐든 이왕이면 좋은 쪽을 향해 가는 게 좋겠구나.’


 그때는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 내 삶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밑도 끝도 없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보다 ‘좋은’ 고등학교인 국제고에 지원을 했던 것이었다. 다만 ‘좋은 게 좋은 거’, ‘넓은 물이 좋은 물’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차츰 흔들리며, ‘좋은 물’과 ‘넓은 물’에 대한 생각을 복잡하게 일구게 해 준 것이 바로 그 국제고에서의 생활이었다. 이전 글들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좋은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일 수는 없었다. 뛰어난 친구들이 많은 만큼 학업 환경은 우수했지만, 목표에 따른 개인적인 성취를 이뤄낼 수 있는 순간이 몇 없었고, 내가 이 학교에서 지내며 무언갈 얻어서 기쁜 마음보다 무언갈 잃어서 괴로운 마음이 더 크다면 불행해지는 것이 바로 국제고에서의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깨진 것은 이때의 경험에 의해서였고, 아무리 좋은 대학에 합격했어도 합격할 때 문을 닫고 합격하는 경우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 이후의 생활이 심히 걱정된다는 일종의 방어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어디에 가서든 나만 잘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어디에서’ 잘하느냐에 따라 미래에 아주 큰 차이가 발생하긴 할 것이다. 다만 큰 물에서 잘하든 작은 물에서 잘하든 내가 ‘잘하고 있다’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내가 서는 무대에 그렇게까지 집착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어디까지나 본인이 내리는 가치판단에 따라 달라질 문제 같다.


 내게 아주 최소한의 대학 욕심만 있는 이유도 아마 나는 내가 설 ‘무대’보다는 어느 무대에 서든 그 자리에서 ‘빛나는 나’를 원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론 대학 입시를 위해 쳇바퀴 돌리는 햄스터처럼 공부하는 게 싫은 것도 있다...ㅎㅎ.


 제목에 ‘_220309_최종. hwp’라고 써 놓았지만 아직은 미완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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